은수는 많이 힘들어했다.
상담하며 살살 건드려 놓은 마음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버려 혼자서는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흘러넘치는 듯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듯한 은수는 감정이 느껴지면 그 감정을 덮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삶이 바빠서, 혹은 저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혹은 착한 아이가 되고 싶어서 덮어둔 마음은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 선생님....
잠이 많은 내가 초저녁에 잠이 들면 새벽 2시에서 3시경에 은수는 꼭 한 번 정도 문자를 남겨왔다. 가끔 확인해 보면 길고도 긴 문자 메시지가 카톡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은수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만나서 이야기하면 고민이 있느냐는 물음에 한참을 대답하지 않고 망설이는 아이고, 기다리고 기다려도 “괜찮아요.”라는 말만을 남기는 아이다. 그런 은수가 길고 긴 메시지에 제 마음과 생각을 담았다는 건, 그만큼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는 것.
즉각적으로 반응해 주진 못했지만 한 번도 답을 거르진 않았다. 어린 딸이 보채더라도 답은 보내주었다.
- 학교 가서 이야기 나누자.
- 오늘은 꼭, 점심시간에 교무실에서 봐.
만나도 특별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실없는 농담과, 걱정 어린 잔소리만 가득했던 적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수는 조금씩 변해갔다. 꾸준히 이어진 메시지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은수와의 상담 덕분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그냥 시간의 흐름 덕분이었을까. 그것은 아직도 모르겠다.
해가 바뀌었고, 은수는 2학년이 되었다. 다시 1학년을 가르치게 된 나는, 어쩐지 도통 은수를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수가 밝은 모습으로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 저 반장 됐어요!!!!”
2학년 1학기 반장이 되었다며 한껏 웃으며 자랑하던 은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요동치던 나의 마음도. 1학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구나, 네 삶을 조금씩 이끌어갈 힘이 생겼구나 싶어 안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은수는 숨겨두었던 리더십을 마음껏 보여주었다. 동생을 챙기던 마음으로 친구들을 챙겼고, 부모님을 대하던 마음으로 선생님들을 대했다. 많은 선생님들이 은수를 칭찬했다. 좋은 소식이 들릴 때마다 절로 기뻤다. 그래, 그럼! 누구 제자인데. 하며 속으로 많이 행복해했다.
평온함이 물밀듯이 밀려오던 어느 날.
문득 그 옛날 제자들과 함께 했던 멘토링 장학이 생각났다. (그렇다. 수정이와 했던 그 멘토-멘티 장학!) 은수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가정 상황, 그리고 아이의 잠재력, 나와의 라포 등등. 뭐 하나 부족할 것이 없어 당장에 은수를 만나 설득했고, 함께 준비했다.
학년이 달라 만나기가 힘들었음에도 은수는 잘 따라와 주었다.
2주 간의 노력 후, 은수는 10년 만에 나를 멘토 선생님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중3이 된 지금. 은수와 나는 멘토-멘티 선생님으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고 있다. 장학생이 되면서부터 눈에 띄게 밝아진 은수는,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평소 잘 읽지 못했던 소설책을 잔뜩 사서 틈나는 대로 읽어가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고 나 역시 그런 은수를 지켜보면서 말없이 응원해주고 있다. 최근엔 직업박람회에 다녀와 고등학교 입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아 사방팔방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녀석은 3학년 나는 1학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아쉬워서, 또 카톡으로만 메시지를 보내면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아서, 녀석에게 제안한 교환일기 덕에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있다. 열쇠로 잠글 수 있는 일기장에 우리는 사는 이야기, 고민, 그리고 이런저런 넋두리를 담아 보내고 있다. 어쩐지 그 옛날의 필담이 업그레이드된 기분이랄까.
요새 은수가 전보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힘든 것 같아 걱정이다. 곧 날도 추워지는데 말이다. 아침도 잘 안 챙겨 먹고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대충 먹는 은수를 옆에 두고 계속 잔소리해주고 싶은데 나는 이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게 아쉽다.
이제 곧 졸업을 하면 더 이상 학교에서 은수를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오며 가며 수줍게 인사하던 녀석, 그리고 존경하는 사람을 물어보면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존경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아낌없는 마음을 전해주던 녀석 덕에 힘을 냈는데, 이제 내년 2월이 되면 어떡하나, 싶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안녕이 영원한 헤어짐이 되지 않도록 볼 수 있는 그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 자주 만나고 서로 소통하는 수밖에.
그렇게 지내다 보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은수가 한 번쯤은 찾아오지 않을까.
“선생님!!!! 저 고등학생 됐어요!!!” 하면서.
그럼 나는, 은수의 흑역사가 가득 담긴 중1 때 사진을 잔뜩 준비해 둬야지.
야! 이은수, 이제 오냐? 밥은 먹었어? 너 아침 안 먹었지? 내가 아침 먹으라고 했지?
잔소리는 덤으로.
글을 마치며 은수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편지로 담는다.
<은수에게>
은수야. 선생님이다. 그날, 우리 학교 앞 커피숍에서 상담하고 돌아가던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너에 대한 글은 따로 꼭 써야겠다 다짐하고 시작한 글을 이제야 마무리해.
아무리 노력해도 너에 대한 글은 담아도 담아도 부족하고 고르고 골라도 어렵더라.
이 글을 네가 언제 볼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다 담지 못했던 선생님의 마음을 너라면 헤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은수야.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단다.
지금 당장은 크게 보이는 문제들도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너무나 작게 느껴지기도 하고.
마음이 힘들고 우울해서 어떻게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우리 그랬던 것처럼 종이 한 장을 펴 놓고,
혹은 컴퓨터를 켜 놓고
글을 써봐.
글 속에 마음을 담아봐.
글 안에 너를 표현하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괜찮아지는 너를 발견하게 될 거야.
너는 평안해질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언젠가 이 모든 것을 추억하며 만날 날을 기다릴게.
- 2024. 10. 20. (일) -
은수를 아끼는 선생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