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추천해 준 적은 많지만 추천받은 적은 거의 없다. 좋아하는 구절마다 포스트잇을 잔뜩 붙인 책을 받아 본 적은 더더욱 없다. 책이란 게 워낙 취향을 타는 것이라서 추천해 주기도 추천을 받기도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처음'을 내게 선뜻 선사한 친구가 있다.
뭐든 처음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법. 지난주 내 마음을 울린, 다경이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0월 25일 금요일.
중요한 회의를 한창 하던 중이었다. 반드시 내가 참석해야 하는 회의였고, 내용 자체가 무거워 잠시 자리를 비울 수도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날 수도 없었다. 딴에는 유치원에서 기다리고 있을 딸아이가 무척이나 마음에 밟히던
그때, 평소에 연락을 잘하지 않던 다경이에게 갑자기 문자가 한 통 왔다.
"선생님. 지금 어디 계세요? 제가 선생님께 꼭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내가 알던 다경이의 모습과 달랐다. 평소의 다경이라면 선생님께 문자를 보내며 만남을 종용할 아이가 아니었다. 기다릴 수 있는 만큼 기다리거나, 혹은 나중을 기약하며 메모를 남길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회의 중이 내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것도 꼭 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서? 짧은 메시지 속 행간의 의미를 살피자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회의가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고 묻자, 다경이는 냉큼 괜찮다며 기다릴 수 있는 데까지 기다리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중간에 빠져나갈 수 없는 노릇이라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회의를 이어 갔다.
5시를 훌쩍 넘긴 시간. 교무실 앞엔 다경이와 이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던 그 눈빛. 그리고 나에게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책, 한 권.
"선생님께서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거든요!"
하며 건넨 책엔 다경이가 인상 깊게 읽은 구절마다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면 제게는 엄청나게 의미 있는 책일 텐데 그토록 소중하고 의미 있는 책을 내게 빌려준다는 것 자체가 고맙고 감동이었다. 게다가 나는 책과 글을 사랑하는 사람. 받자마자 당장 읽고 싶었으나 현실이 쉽지 않아 요새 책을 읽을 여유가 없어 오랜 시간 동안 못 보고 방학 때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니 흔쾌히 돌아오는 다경이의 대답.
"괜찮아요! 천천히, 편할 때 보세요! 언제고 보시고 주시면 돼요."
그 마음이 고맙고 예뻐서, 감동이라는 말, 고맙다는 말, 이런 제자는 처음이라는 말, 집에 가서 꼭 읽어보겠다는 말을 힘주어 건네곤 주말을 맞이했다.
<잔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제목부터가 마음에 쏙 들었다. 수업 때에만 만나는 녀석이 어찌 내가 지향하는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했을까 신기해하며 한참을 곱씹었다. 내가 좋아하는 말. 잔잔한 것. 그러나 내면은 단단한 것. 삭막하고 힘든 학교 생활에서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이, 그것도 아직은 어린 학생이 있다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책장을 하나씩 하나씩 넘겨 보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는 에세이로 정영욱이라는 작가가 건네는 메시지가 가득한 책. 작가의 결이 나와 잘 맞아서 나 역시 책장을 넘기는데 한 문장 한 문장 마음에, 머리에 남는다. 겨우 30페이지 밖에 읽지 못했지만 작가의 따뜻한 위로가 큰 힘이 되어 하루를 버틸 힘을 주고 있다. 아마 다경이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책. 어쩐지 녀석이 고맙다.
사실 책 추천이라는 게 어렵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겠지만 책은 정말 '상대의 취향'을 잘 파악해야만 한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에세이를 건네거나, 실용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설을 건네면 그만큼 힘든 것이 없다. 게다가 요새 책 읽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더욱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고. 워낙 책을 좋아하는 나인지라 주변 친구들에게 책을 많이 권해봤지만 그때마다 좋은, 경험은 많지 않기도 했고.
그렇다 보니 책을 추천해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소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것을 좋아할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무엇이 필요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를 한참이나 생각하고 마음으로 그리며 고른 책은 대부분, 상대의 마음에 쏙 들고 만다.
다경이 역시 그랬다. 티를 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섬세한 녀석은 숨기고 숨겨도 흘러넘치던 나의 슬픔과 힘듦을 눈치챘었나 보다. 교사로서 힘든 순간들, 고통스러운 마음이 쌓이고 쌓일 때면 남몰래 눈물 훔치며 글 쓰던 밤들을 헤아렸나 보다. 그 따뜻한 관심이 고마워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애쓰던 나를 알아준 게 참말로 고마워서 다경이가 건넨 그 책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리 애들 가르치는 게 힘들고 지친다고 하더라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 한 명만 있으면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을. 2024년도에는 다경이가 내게 그런 믿음을 주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나도 다시금 힘을 채워서 앞으로 만날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것을.
다경이의 그런 섬세함과 따뜻함이 좋아 글쓰기를 제안했다.
나와, 이현이, 서윤이, 그리고 다경이. 이렇게 넷이서 책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시, 소설, 에세이가 넘실댈 우리의 책을 상상하며 바쁘겠지만 힘써보기로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나누어준 온기를, 나눌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