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우 Jun 27. 2021

[단편 소설] 혜은

당신이 말하지 않은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엄마, 이건 정말 오래된 이야기야. 엄마에겐 한 번도 하지 못한, 어쩌면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인지 몰라. 육 년이나 지난 일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험이거든.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쓰는 이 글이 진실이라는 거야.


스무 살이었어. 대학에 막 입했을 때지. 엄마도 알겠지만, 나는 성적에 비해 괜찮은 대학에 입학했잖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던 내가 괜찮은 대학에 진학한 걸 두고 엄마는 놀렸었지. 기억할지는 모르겠어. 사실, 나는 그 말이 상처였던 것 같아. 지금도 잊지 못한 걸 보면 말야. 신입생 때는 내내 기분이 좋았어. 늘 그랬던 거 같아. 내가 배우고팠던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평소 성적보다도 좋은 대학교에 왔으니까 만족스러웠지. 학교는 아름다웠고 친구들도 괜찮았어. 치열하지 않은 학풍도 디자인관의 복도도 개성있게 옷입는 교수님들도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었던 한 때였지.     


오월로 기억해. 개강총회하고 동아리 MT를 다녀오고 학과 내에서 나를 좋아한다던 남자애랑 데이트하고 과팅도 해보고.....나는 뭐든 마음이 내키면 다 해봐야 하는 사람이잖아. 닥치는 대로 다 해본 거 같아. 일 학년이라는 이유로 학점은 뒷전이었고 새로운 걸 경험하는 데만 몰두했지.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서야 번쩍 정신이 들었어. 이대로 기말고사를 치르면 일학기 학점이 엉망일 거란 직감이었지. 강의에 집중하고 일주일에 두 번은 도서관에 오갔던 게 그해 오월이었어. 벚꽃도 다 졌고 축제도 끝났으니 더는 놀 핑계도 없었지. 과팅으로 만난 애들은 지루했고 나를 좋아한다던 남자애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거 있지. 그게 싫었어. 얼굴은 멀쩡한데 나를 겁내는 것 같아서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어.


교양 강의를 듣고 나오는 날이였어. 키 작은 남자가 벽에 기댄 채 서 있었어. 친구 둘과 함께 걷고 있을 때, 불쑥 남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지. 깜짝 놀랐어. 혹시라도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 걸까. 친구들이 묘한 웃음을 짓고 먼저 떠났어. 그는 다짜고짜 내게 십 분만 시간을 내달라고 했어. 종교인일까. 포교를 목적으로 접근한 걸까. 쓸데없는 망상을 하다가 이런 경험도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지. 나는 남자와 함께 매점을 끼고 있는 공터로 향했어.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지. 꽃을 다 떨군 벚나무가 파르르 잔가지를 떨고 있었어. 꽃은 지고 없는데 어디선가 꽃향기가 나고 있었어. 남자는 잘생겼다고도 못생겼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어. 그가 캔 커피 두 개를 사 왔어. 나는 커피를 받지 않고, 무슨 일로 나를 부른 거냐고 되물었지. 남자는 망설이다가 이유를 말했어.    


엄마, 엄마는 전생을 믿어?

엄마, 엄마는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해?


거짓말이라고 여겼어. 미친 사람이라고 치부했지. 하지만 그리 말하기에는 진지했고 그는 도저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장난치는 거냐고 물었지. 그가 캔 커피를 땄어. 공기 새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가 내 이름을 불렀어. 이윽고 어릴 적 내가 겪은 사고를, 내 몸에 흉터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줄줄이 이야기했어. 놀랍다기보다 소름끼쳤어. 설마, 이걸 어디선가 조사한 게 아닐까 싶었지. 하지만 아니었어. 십분만 이야기한다고 해 놓고서 나는 한 시간을 넘게 그와 대화했어.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몇 개 있었어. 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그는 알고 있었거든.


인과는 몰라.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그도 설명할 수 없었어. 그는 몇달 간 혼란을 겪다가 겨우 인정했다고 했어. 지금의 나를 볼까 말까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겨우 말을 건넨 거라고 했지. 그와 나는 같은 학교였고, 신입생인 나와 달리 그는 올해 졸업을 앞두고 있었어. 학위를 마치기 위해 돌아왔다가, 이제 입학한 내게 말을 걸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다음 강의를 들어야 했어. 내가 말하자 그가 연락처를 줬어. 강의실로 가는 내내 나는 자신에게 물어봤지. 대답은 아니었어. 도저히 내가 사랑했을 거로 여겨지지 않는 남자였어. 아무리 봐도 내 스타일은 아니었어. 만약, 정말 혹시라도 내가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면 그건 처연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래, 처연함. 스물의 내가 그에게서 읽을 수 있었던 건 슬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난 사람 특유의 처연함이었어.     


친구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어. 연락처를 물어보길래 주지 않았다고 얼버무렸지. 믿어줄 리가 없잖아. 나도 믿을지 말지 확신이 안 서는 걸, 누구에게 말하겠어. 결국 비밀로 한 채 그의 연락을 기다렸지. 연락이 올 거로 생각했어.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어. 나는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서 먼저 연락했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니까 십분만에 답이 오더라.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에게 커피라도 하겠냐고 먼저 말했어. 그가 좋다고 해서 학교 근처 카페에서 저녁에 보기로 했어. 나는 그날 있었던 데이트를 취소했어.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그를 만났어. 전과 비슷한 옷차림이었어. 밋밋하면서도 깔끔한 패션. 단정히 자른 머리. 도저히 스물여덟으로는 보이지 않는 외모. 정말 스물 서넛 정도로 보였어. 하지만 분위기만큼은 나이 많은 사람처럼 느껴져서 이질적이었지. 두 시간 정도를 보낸 거 같아. 재미없었어. 즐겁지 않았어. 그는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줬고 내가 물어보는 것도 상세히 설명해줬지. 하지만 뭔가 간질간질한, 마음에 드는 남자애와 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기분이 전혀 없었어. 엄마, 언젠가 내가 엄마한테 물어봤잖아. 엄마처럼 예쁜 사람이 왜 우리 아빠를 사랑했을까. 그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어. 아빠랑 같이 있을 때, 가장 진실할 수 있어서 사랑했다고 말야.     


나는 요즘에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스물의 나는 머리로도 그걸 이해하지 못했어. 잘 생기지도 않은 남자를, 아무런 호감도 못 느끼는 남자와의 대화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지 몰라서 애꿎은 머리칼만 꼬아댔지. 한참 침묵하다가 그가 먼저 말했어. 지금 나오는 노래는 'Ryuichi Sakamoto'의 'Merry Christmas Mr.Lawrence'라고 말야. 아시아인이 처음으로 그레미상을 받은 곡이래.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음악을 감상했어. 피아노의 절정 부분을 듣다가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지 뭐야. 그래도 이건 좀 재미있네. 노래가 끝나고 그가 먼저 일어나자고 말했어. 나는 궁금했어. 방금 이야기는 도대체 왜 한 건지. 내가 물어보자 그는 단지 웃을 뿐이었어. 문을 열어주고, 내가 나갈 때까지 문고리를 잡아주더라. 집까지 바래다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그는 손을 흔들었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오늘 바람맞힌 데이트 상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어. 제멋대로 굴어놓고서 괜한 거짓말을 늘어놨지. 나를 보고 싶어 하는 남자는 한둘이 아니었고 나는 사람이 귀한 줄 모르고 있었지. 친구와 통화했어. 우리는 매력 없는 남자의 특징을 주제로 수다를 떨었지. 열시가 될 때까지 통화하고는 밀린 과제를 조금 더 했어. 열두 시가 됐을 때 이를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었지. 그날 밤엔 잠을 설쳤어. 지독할 정도로 설쳤지. 아침이 찾아왔을 땐 두 눈이 뻑뻑했어. 어제의 일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지. 기분이 나빠졌어. 그를 만나서 잠을 설친 것만 같았거든.     


몇 주가 지났어. 기말고사가 다가와서 눈코 뜰 새 없어 바빴어. 그를 잊었지. 공부에만 전념했어. 매일 도서관에 틀어박히다시피 했어. 시험을 치르고 나니까 친구들과 술자리가 이어졌지. 연거푸 이어진 술자리. 점수에 대한 나름의 불평들이 불콰하게 퍼졌지. 천만다행으로 나는 3.5점은 넘어서 안심했어. 이주 가까이 술과 만남에 절은 채로 살았던 거 같아. 언젠가 친구들과 새벽 네 시까지 함께 술을 마시고 홀로 돌아오는데.....나는 그에게 전화했나 봐. 기억나지 않아. 내가 왜 전화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어. 아침이 됐을 때, 나는 어제 전화했던 걸 기억해냈어. 새벽 네 시 이십 분부터 다섯 시까지 사십 분간 통화는 이어졌었어. 내가 여섯 번은 넘게 걸었더라. 나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 술에 취한 채로 그에게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방학엔 집으로 내려왔지. 엄마와 아빠, 호연이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지. 일주일을 집에서 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 친구들을 좀 보고 나니까 마땅히 할 게 없더라. 대외 활동이든 동아리든 좀 찾아보려고 하다가 문득 그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없냐고 물어보고 싶어 전화했어. 그는 받지 않았어. 다시 전화가 온 건 정말 늦은 밤이었어. 11시였나. 내가 잠들기 직전에 그가 전화해서 받았지. 그는 미안하다고 운을 뗐어. 나는 본론을 꺼냈지. 수화기 너머로 진심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내게는 형언할 수 없는 불편이 다가왔지.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아 망설일 때, 그가 한 번 더 말했어.  


정말, 별말 안 했어요. 걱정 말아요.     


따뜻한 목소리였어. 그래,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었지. 다시 잠들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어. 나는 열두 시가 넘었을 때 그에게 전화했어. 그가 받았어. 커피 한번 더 마셔요. 그래요. 날짜를 정하고서 전화를 끊었어. 나는 깊이 잠들었어.     


두 번째는 그가 좋아한다던 카페에서 만났어. 재즈가 흘러나오는 카페였는데 앤티크한 소품이 많아서 마음에 들었어. 이번에도 나는 그에게서 어떤 호감도 느끼지 못했어. 어째서 내가 그를 다시 보고 싶었을까, 그게 못내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어. 할 말이 없어 멍하니 있자 그가 먼저 말했어. 지금 나오는 노래는 'Beatles'의 'Something'이라고 말야.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설명해 달라고 했어. 1969년도의 노래래. 먼지가 폴폴 일어날 것 같은 팝송을 우리는 함께 듣고 있었어. 조지 해리슨이라는 가수가 부인을 위해 작곡한 곡이라면서 그가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더라. 눈을 감고 조용히 들으니까 마치 라디오를 듣는 것 같았지. 나는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어. 아버지가 팝 DJ였어요. 나는 마치 그 이야기를 아주 예전에 한 번 들은 것만 같은 기시감을 느꼈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웃었어. 웃는 얼굴만큼은 괜찮아 보였어.


그가 먼저 일어나자고 말했어. 문을 잡아주고 내가 발을 디딜 때였어. 높아요.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빤히 봤지. 그가 내 구두를 가리켰어. 문턱이 높아서 조심해서 디디라고 한 말이에요. 미래의 내가 이 남자의 어떤 면에 끌렸는지는 조금 짐작됐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스물의 이혜은은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확신을 얻었지. 이번에도 나는 돌아섰어.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다짐했어.


그와 헤어진 저녁부터 나는 많이 아팠어. 조금씩 감기 증세를 보이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아팠어. 다른 건 견딜 수 있었는데, 엄청난 두통이......머리가 쪼개질 듯한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방학이라서 다행이었어. 친구한테 연락해서 감기약이랑 배달 음식을 받았어. 억지로 음식을 먹고 약을 먹고 잠들었지. 사흘일까, 나흘일까.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침대 위를 유영하다가 겨우 몸을 추슬렀지. 나흘이 지나 있더라. 핸드폰에는 나를 찾는 수많은 부재중 통화와 답하지 않은 카카오톡 메시지가 쌓여있었어. 나는 일일이 답장을 보냈지. 왜 아팠는지, 그동안 어떤 상태였는지 설명했지. 통화를 바라던 친구에게는 목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안된다고 말했어. 오직 통화한 건 엄마와 아빠 둘뿐이었어.    


그를 만나지 않겠다는 마음은 점점 더 강한 고집으로 변했어. 이유는 모르지만, 그를 만나고 나면 내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건 분명했어. 하지만 엄마, 나는 동시에 그에게 연락하고 싶었어. 당신 때문에 내가 이토록 아팠노라고 분명 내가 아픈 것과 당신과의 만남에는 관계가 있는 거라고 따지고 싶었어. 아니, 어쩌면 위로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딱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어. 그가 내게 완벽히 솔직하지 않았다는 거야. 무언가 말하지 않고 있었지. 하지만 겨우 그런 일로 내가 불안을 느끼고 이토록 아플 수는 없었어.  


겨울이 올 때까지 우린 연락 없이 지냈어. 내 다짐은 반년간 잘 지켜졌던 거야. 겨울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일상을 회복하고 남자친구도 한 명 사귀었다가 헤어졌었지. 짧은 연애. 친구들과의 중국 여행. 겨우 받은 3.6 이상의 학점. 여러 동아리와 대외 활동.....바쁘게 지냈어. 마음 한구석으로 나는 그의 연락을 기다렸던 것 같아. 설렘이나 호감이 아니라 의문 때문에 기다렸어. 그가 내게 먼저 연락하면 나는 물어볼 작정이었어. 당신이 내게 말해주지 않는 게 뭔지, 어째서 당신을 만나면 나는 이토록 몸이 불편해지는지. 답을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 전부 다 내 망상일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고 해도 좋아. 차라리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깨끗해질 테니까.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됐어. 이번에는 술자리를 피했어. 한 번 겪어봐서일까. 나는 시험이 끝난 걸 핑계로 마시는 술자리가 불편했어. 남자애들의 관심이, 전 남자친구의 잦은 연락이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는 느낌었어. 쉬고 싶었어. 이번에도 집으로 내려가서 일주일을 보냈지. 엄마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몰랐을 거야. 사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히는지 몰랐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허무한 마음을 달래려 엄마보고 밖으로 나가자고 했지. 우린 광안대교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지. 3층 테라스에서 창밖을 보니 광안대교가 보이더라. 밤에 왔으면 더 좋았을 거야, 그치. 엄마는 대답않고 나를 바라봤지.   


서울에 두고 온 거라도 있어.     


나는 대답할 수 없었어. 마샬 스피커에서 내가 아는 음악이 흘러나오더라. 설명할 수도 없는 감정에 휩싸여서 나는 다 털어놓을 뻔했어. 내가 느끼는 이 의문과 허무함을 모두 입 밖으로 게워내고 싶었어. 하지만 꾹 참았어. 아무 말도 없이 창밖만 보다가 겨우 대답했지. 


아냐, 없어. 


그를 다시 만나야 했어. 그래야만 했어. 다음날 서둘러서 서울로 올라왔어. 아빠는 서운한 눈치였지만, 그걸 배려할 여유가 없었어. KTX를 타고 오면서 그에게 연락했어. 답장은 오지 않았어. 이튿날에도 연락해 봤지만, 또 답이 오지 않았어. 화가 났어. 엄마, 이상하지. 나는 정말로 심하게 화가 났었어. 그가 연락하지 않는 게, 답장하지 않는 게 너무 화가 나서 잠도 못 잘 정도였어. 내가 누구 때문에 힘든데, 내가 당신 때문에 이렇게 괴로운데 어떻게 답장조차 하지 않느냐고 말이야.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일부러 답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 근거도 없는 상상을 키우며 사흘을 더 보냈어. 드디어 답장이 왔어. 기쁨보다 허무가 더 컸어. 나는 확인하고도 골이 나서 하루 이상 답하지 않았어. 괜한 자존심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너무 화가 났었거든. 그게 아무런 근거도 없고 상대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다만 내 감정이 그랬어. 그는 더 연락하지 않았어. 체념하는 마음으로 내가 먼저 만나자고 말했어. 하루 뒤에 답이 왔어.


알겠어요.     


세 번째 만남은 부산에서였어. 그는 졸업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있었거든. 나는 서울에서 내려온다고 말하지 않았어. 마침, 나도 부산이니까 잘 됐다고만 했지. 괜한 오기를 부렸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고 싶었어. 그를 만나러 부산까지 내려온다는 게 자존심 상하고 쪽팔렸나 봐. 아직도 내 카카오톡에는 내 연락을 기다리는 남자애들이 많다는 마음이 들었다가......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어. 그래, 무슨 소용이야. 나는 더플코트를 챙겼어. 운동화를 신었지. 분홍색 니트를 입고 목도리를 둘렀어. 오전 일찍 KTX를 타고 내려왔지. 부산역에서 출발해 온천장역 앞에 내렸어. 3번 출구로 나오니까 그가 서 있었어. 돌로 만들어진 교각 위, 난간에 기댄 채였어. 내가 인사하지 않고 다가가자 그가 먼저 고개를 까딱였어. 입김이 뽀얗게 올라 올 정도로 추운 날이었어.


어디로 가요.     


그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여기까지 온 거였어. 그는 도착하면 알 거라며 택시를 잡았지. 우리가 내린 곳은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앞이었어. 금정구에 있는 우리 학교 앞을 그와 함께 걸었지. 왜 여기를 걷고 싶었냐고 물었어. 그는 나의 대학 시절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고등학교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했어. 괜찮다면 말해달라고 하더라. 그건 스물의 이혜은도 할 수 있는 일이지. 나는 거리를 쏘다니며, 지난해까지 내게 익숙했던 풍경을 설명했지. 내가 자주 가던 떡볶이집에서 식사하고 작년까지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카페에 들어가서 함께 커피도 마셨지. 이야기가 길어졌어. 오후까지만 보고 헤어질 작정이었는데, 나는 그에게 들어야 할 게 너무 많았어. 저녁까지 시간이 되냐고 물었지. 그 말을 하는 게 참 힘들었어. 그가 괜찮다고 대답했어. 우리는 부산대에서 서면으로 내려왔어. 그다음에는 광안리를 걸었지. 한겨울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계속 걸었지. 저녁 식사를 하고는 다시 카페에 들어갔어. 두 번의 식사, 두 번의 커피. 재미없는 데이트의 표본이었어.


카페에서는 음악이 나오고 있었지. 서로 말을 않고 있자, 그가 지금 나오는 음악을 설명해줘도 되겠냐고 했어. 언 몸을 녹이는 동안은 아무 말도 나올 것 같지 않아서 그러라고 했어. 'Eric Clapton'의 노래였어. 'Layla, Wonderful Tonight, Tears in Heaven'이 연달아 나왔지. 그는 에릭 클랩톤과 조지 해리슨, 페티 보이드의 삼각관계를 천천히 설명해줬어. 


나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어. 내게 숨기는 게 있죠. 그가 놀랐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어. 나는 그게 뭔지 알고 싶다고 말했어. 정말 솔직하게 다 털어놨어. 당신을 만나고 나면 아프다고, 잠을 뒤척이고 몸살을 앓는다고. 오늘 밤은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알아야겠다고 어째서 내가 아픈 건지, 당신이 내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꼭 알아야겠다고 말야. 그는 침묵한 채 가만히 있었어. 대교의 불이 꺼질 때쯤 카페 점원이 다가왔어. 곧 문을 닫는다고 하더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어. 지하철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해변이 시야에서 멀어지면서 나는 조급해졌어. 다시 화가 났어. 그에게 말해주지 않을 거냐고 쏘아붙였어.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어. 그가 멈춰 섰어. 울었어. 울고 있었어. 그가 가만히 서서,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서 조용히 흐느꼈어. 눈물이 바닥으로 툭툭一무심히 떨어지더라.     


말해 줄 수가 없어요.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어. 엄마, 그건 설명하기 힘든 거야. 도저히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이 세상에는 있는 거야. 나는 알 것 같았지. 그의 눈동자가 무얼 의미하는지, 그가 말할 수 없다는 게 어째서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 함께 지하철역까지 내려왔어. 개찰구를 앞에 뒀을 때, 내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어.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은 확신이 되고 있었지. 그는 나를 찾지 않을 거야. 다시는 나를 보지 않을 거야. 나는 영원히 이유를 알 수 없겠지. 그가 왜 내 앞에 나타났고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알 수 없겠지. 나는 개찰구를 향해 걸어갔어. 교통카드를 올리자 삑 소리와 함께 1,300원이 결제됐어. 나는 돌아봤어. 나를 배웅하는 그에게 말했어. 이대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을 거냐고, 이대로 헤어질 거냐고 말야.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나는 개찰구를 밀지 않은 채 무언으로 답을 요구했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았어.    


같이 잘 수 있을까요.     


섹스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어. 전혀 그런 느낌은 없었으니까. 엄마, 나는 스무 살 때도 지금도 섹스가 두려워. 누군가와 성관계를 맺는다는 게 내겐 여전히 낯설면서도 두려운 일이야. 그가 바라는 건 무리한 부탁이었지. 머리는 필사적으로 거절하라고 하는데, 마음은 그러지 말라고 싸워댔지. 그럴 때면 바보가 된 것만 같아. 나는 어렵사리 정신을 추슬렀어. 이유를 물었어. 최소한 명분이라도 있어야 그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는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어. 오늘 밤도 아플까 봐요. 나는 고민하는 척했지.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고민하는 척했지. 다행스럽게도 나는 자존심을 꺾었어.  


대답 없이 그를 따랐어. 우리는 모텔에 함께 들어갔어. 말 한마디 없었지. 그가 일회용 칫솔에 치약을 짜서 줬어. 우리는 함께 이를 닦았지. 나는 샤워하지도 않은 채, 청바지를 벗지도 않은 채 침대에 들어갔어. 그가 불을 껐어. 낯선 공간에, 낯선 침대 위에, 낯선 남자와 나는 누워있었어. 종일 추운 곳에 있다가 들어와서일까. 온몸이 노곤해졌어. 정신은 말짱한데 몸만 피로했어. 그는 내 옆에 누워 조용히 숨 쉬고 있었어. 


무슨 말이라도 해 봐요.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그는 내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어. 무슨 짓이냐고 하려다가, 어째선지 이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무 말 없이 두손으로 시트만 꽈악 잡았다가 놓았지. 나는 따지지 않고 그가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지. 뭐라고 말하고 싶었어. 이 모든 게 무슨 의미인지, 왜 이런 걸 바라는지, 지금 이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전부 묻고 싶었지. 하지만 아주 깊고 깊은 해저에 침몰한 듯, 조용한 어둠 속에서 말은 더 필요치 않았어. 눈이 감겼어. 나는 알고 있었어. 그의 손길은 익숙했고 이 손길을 받는 나도 익숙했어.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다시 눈을 뜨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다가 나는 느꼈지. 행복해. 앞으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으면 좋겠어. 모텔에 가서 내 몸이 아니라, 나의 잠을 돌봐주는 남자였으면 좋겠어. 일년 후의 이혜은이 이년 후의 이혜은이 그런 남자를 골랐으면 좋겠다고 되뇌었지. 스르르 눈이 감겨왔어. 낯선 남자가 곁에 있는데 이대로 잠 든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


그래.....어이가 없는 일이잖아.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없었어. 검은 방 안에는 오직 나 혼자였지. 새벽 다섯 시였어. 작은 메모라도 하나 있을까 싶어 불을 켜고 방을 뒤졌어. 종이 쪼가리 하나 없었어. 그의 흔적이라고는 휴지통에 버려진 일회용 칫솔뿐이었어. 꿈은 아니었던 거야. 나는 다시 잠들려고 했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엄마, 나는 정말로 다시 잠들려고 했었어. 그런데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졸려 죽겠는데 잠이 오지 않아서, 신새벽에 엄마한테 전화했던 거야. 놀란 엄마를 달래면서 통화했던 그 날, 나는 모텔 침대에 홀로 앉아 있었지. 10분도 채 되지 않는 통화를 끊고서 나는 이불을 부여잡고 울려고 했지. 눈물이 나지 않아서 힘들었어. 아무리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어 답답했어. 어쩌면 울지 못할 만큼 슬펐는지도 몰라. 그가 오기를 기다렸어. 올 것만 같았어. 아니, 와줬으면 했어. 하지만 해가 뜰 때까지 모텔에 있었던 건 나 혼자였어. 카카오톡에는 알 수 없음이라고 돼 있는 사람과 연락한 기록만 남아 있었지. 나는 나가기를 누르고 그를 삭제했어. 며칠 후 그에게 전화해 봤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번호라는 ARS 안내음만 들려왔어.


엄마, 여기는 광안리에 있는 카페야. 저번에 엄마와도 온 적 있는 'Cafe de Montre' 거기 이 층에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어. 지금은 열 한시가 다 되어 가. 광안대교에는 조명이 켜져 있고, 내게 익숙한 해변을 보며 나는 육 년 전의 이야기를 쓰고 있어. 엄마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할 거야. 할거라면 적어도 오 년 전에는 말했어야 할 일이잖아.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평생 누구에게도 안 할 생각이었어. 그가 나의 죽음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야. 


나는 두렵지 않아. 


그는 다시 내 생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 그와 만나서 죽은 이혜은은 이 세상에 없는 거겠지. 운명은 나를 비켜 간 거겠지.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스물여섯의 내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만나지 않은 나는 살아남았지만, 그를 만났던 나는 살아남지 못하고 여기에 있는 거야. 묘한 기분이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야. 이해시킬 수도 납득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지. 그래서 평생 비밀로 하면서 살려고 했는데, 카페에서 노래를 듣다가 울컥했어. 카페 주인이 일부러 그랬을 리 없지만......내가 피하던 노래가 계속 나왔거든.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힘들었어. 물 두 잔을 하고서야 겨우 마음이 진정됐어. 지금은 'Ryuichi Sakamoto'의 'Say You Love me'가 흘러나오고 있어. 눈을 감고 들어보니까, 뱅스 올 룹슨의 스피커 같아.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의 목소리가 떠올라. 우울한 듯 따뜻한 듯.....부드러운 목소리가 떠올라. 노래에 얽힌 이야기 말고 그는 내게 어떤 이야기도 먼저 할 수 없었던 거겠지. 지난 세 번의 만남이, 나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이 저 광안리의 파도처럼 내 안으로 몰아닥쳐. 나는 이제야 인정해. 그래, 그의 말대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아. 사라질 수 없는 거야. 우리 삶에서 일어난 일은 다만 잊히고 지워져 갈 뿐 사라질 수는 없는 거지.


그는 어디에 있을까. 아직 나를 사랑할까. 이제는 다른 사람을 안고, 그를 위해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때로 나를 생각할까.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까. 올해 내가 죽지나 않을까 걱정할까. 어쩌면 다 잊었을까. 아냐,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도 나도 잊을 수 없을 거야. 시간이 다시 흘러서 미래의 나를 사랑한 남자를 만나는 일도 사랑하는 여자의 과거를 만나는 일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니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 편지를 쓴건 지 이젠 나도 모르겠어. 부치지도 않을 편지를 나는 왜 이토록 정성스레 쓰는 걸까. 믿을 수도 없는 글을 왜 끼적일까. 정말이지 모르겠어. 그냥, 그냥....엄마......난 그 사람이 지금 너무 보고 싶어. 다만 그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쓰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잊힐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잊지 못할까 봐 두려워. 남자친구에게 안길 때도 오빠에게 머리칼을 쓸어달라고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기억과 감촉이, 카페에서 노래를 듣다가 이렇게 울끈하는 마음이 영원할까 봐 두려워. 숨쉬기도 힘든 이 기분을 거듭 겪을까 봐 무서워 죽겠어.


내가 만나지 못한 스물여섯의 이혜은에게 나는 묻고 싶어. 행복했었냐고, 그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냐고 진정으로 묻고 싶어. 당신은 그를 사랑했나요, 같은 질문은 하지 않을 거야. 그건 스물여섯의 나도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으니까. 지금의 나라면 그를 사랑했겠지. 그의 사려 깊은 행동을, 말 없는 배려를 애정으로 받아들였겠지. 이제 카페에는 'Eric Clapton'의 'Wonderful Tonight'이 흐르고 있어. 우리의 축가였지. 나는 엄마가 그걸 떠올리는 게 두려워서 이 편지를 바다에 띄울 거야. 아무도 알지 못하게, 우리 둘 말고는 누구도 이 세계의 진실을 알 수 없도록 묻을 거야.


그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선이라는 걸, 나도 이제 아니까.    


-FIN-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화성과 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