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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Of 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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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푸름 Mar 01. 2021

나를 푸름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저를 푸름이라 불러주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푸름'은 누구.


Yves Klein - International Klein Blue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서 활동을 마무리한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을 넉 달 동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이 성장하였음을 체감하였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본 기고문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서 작성하는 마지막 오피니언이고, 다음 글부터는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로서 작성하는 글이 될 것이다.


 막상 나의 글쓰기 성장호르몬이었던 아트인사이트에서는 실명을 사용했지만, 지난 넉 달은 나의 필명으로서의 자아가 가장 급격하게 성장한 시간이었다. 글을 쓸 때 나는 ‘최호용’이 아니라 ‘푸름’이 된다. 푸름은 나의 자아 자체이고, 나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왜 필명을.


김환기 - Universe 5-IV-71 #200 ⓒ (재)환기재단 환기미술관


 나는 글을 쓸 때 실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가 실명으로 활동하는 아트인사이트에서는 실명을 쓰지만, 다른 곳에서는 모두 필명을 사용한다. 필명은 나에게 수도 없이 쏟아지는 판단들로부터의 도피처이자 가면이다. 그러나 나는 그 가면을 쓰고 도피처에 숨어 있을 때에, 나의 모습을 진정으로 보여줄 수 있다.


 세상에는 인구만큼의 인생이 있다. 완벽히 같은 인생은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완벽히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각자는 각자의 사고 속에서 타인을 ‘관찰’할 수밖에 없고,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바람직한 태도는 아마 모든 판단을 중지하는 것일 테다. 경중이 있겠지만, 모두는 각자 나름의 고난이 있었을 테고 모두는 각자 나름의 행복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누군가를 판단하고야 만다. 나의 잣대로, 나의 사고로, 나의 인생으로.


 내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 예술적일 수 있는 순간, 솔직해질 수 있는 순간은 글을 쓸 때이다. 나의 글은 나의 사랑이고, 내가 만들어낸 생명이다. 글을 쓸 때만큼은 누군가에게 판단 당하고 싶지도, 누군가를 판단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의 이름은 ‘판단 당하기 쉬운’ 이름이다. 결코, 필자가 ‘특정 성별에 어울리는 이름’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본명은 ‘남성에게 어울리는 이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필자는 남성이 맞다.


 호용은 범 호(虎) 자에 용 용(龍) 자를 쓴다. 고심하여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께는 조금 죄송스러운 말이기는 하지만, 나는 나의 이름에 대한 부담감을 많이 느꼈다. 나는 호랑이와 용 같은 사람이 아니다. 차라리 강아지와 거북이 같은 사람이다.


 실명으로 글을 쓰면, 시작도 전에 나의 글은 판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름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젠더에 있어서 더욱 각별한 판단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나의 글을 조금이라도 읽어 보았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글에는 성별이 없다.


 그래서 필명을 쓴다. 물론 워낙 공개적인 사람인지라, 글 속의 ‘푸름’이 현실 속에서는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의 노력만 있다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조금의 노력’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아가, 나에게 조금의 관심을 둔다면 나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쉬이 알게 될 테니 말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생각, 나의 사랑, 나의 글에는 관심이 없는 이가, 나의 작은 생명을 짓밟는 것이다.


 나의 새싹에 관심을 두는 이가 건네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한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사랑하는 푸름이니 말이다.




왜 '푸름'을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필명은 오로지 나의 의지로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푸름’으로 지었는가?


 푸른색은 슬픔의 색이다. 동시에 지혜의 색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부분은, 그의 보색인 노란색과 어우러지면 자신이 빛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위에 올라선 노란색이 마음껏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색이다.


 그런 푸른색은 나에게 가장 빛나는 색이다.


Vincent Van Goght - Starry Night Over the Rhône


 또, 한때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기만 했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가장 많이 사용한 색이기도 하다. 고흐의 그림을 보라. 사람들은 보통 그를 노란빛으로 기억하곤 하지만, 그의 노란빛이 빛을 발한 것은 푸른빛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브 클랭Yves Klein의 International Klein Blue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실물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온라인에서 마주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의 푸른색은 나에게 슬퍼하는 것이 나쁜 일인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이처럼 푸른색은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모두를 안아주는 관용의 색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푸른빛을 띠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나의 필명은 푸름이다. 게다가 ‘푸름’이라는 이름으로는 쉽게 성별을 예측할 수 없다. 또, 아주 흔한 이름도, 아주 드문 이름도 아니다. 매력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저를 푸름이라 불러주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푸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내가 괴로운 판단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의 소중한 생각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는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저를 푸름으로 알고 싶은 당신을 환영합니다! 저를 푸름이라 불러주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트인사이트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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