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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열두달 Oct 18. 2023

그래 힘들지? 밥 잘 챙겨 먹고..

삶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실패와 무기력함 속 예기치 못한 기쁨과 슬픔을 함께 안겨준 푸른이와의 짧았던 시간.

만남도 이별도 그 무엇도 내가 정할 수 없었다.



퇴사와 3년 간의 수험 생활의 실패를 뒤로하고, 남편과 나는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긴 수험 생활 기간을 보내고 나니 꽤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의 생각보다 새 생명, 푸른이는 우리에게 빨리 찾아왔다. 그 과정은 참 신비롭고도, 신기했다.


진로에 대한 방향을 잃고, 연속된 실패감에 젖어있던 내게 찾아온 새 생명의 의미가 너무나 컸다. 내게 찾아온 선물과도 같았다. 남편과 나는 이 기쁘고 설레는 마음을 함께 이야기하며 가족들과 다 함께 모두가 들떠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쉽게 찾아온 탓일까? 너무 섣불리 들떠서 기뻐했던 탓일까?      


몇 주뒤 새벽, 아랫배의 통증과 함께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에게 가지 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 정도는 원래 있는 통증인가 보다 생각하며 누워 안정을 취하려 노력했다. 남편은 회사로 가고, 통증은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결국 남편에게 긴급히 전화를 하고, 근처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가게 되었다. 허리도 펴지 못할 정도의 통증이었다. 본능적으로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의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응급실에서 오래 기다린 후에 진료를 받았다. 


의사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왔다 갔다 분주하게 다니면서, 나에게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면서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기집이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었다. 잘못 자리 잡은 곳에 출혈과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대로라면 과다출혈, 쇼크 등의 위험도 있다 하였다. 그렇게 들떠있는 모든 가족들에게 남편이 이 사실을 알리고, 나는 즉시 수술준비를 거쳐 긴급한 수술을 받게 되었다. 마취가 풀리고 병실로 옮겨졌다.

    

슬프고 아픈 마음보다는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내 감정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상실감과 허무함보다 나를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는 마음이 더 앞섰다. 사실 그랬다. 부모님, 가족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모두 기뻐서 들뜬 모습과 너무나 대비되는 이 상황이 어색하고, 침묵이 무겁게 느껴졌다.                


병실에서 모두가 돌아가고, 남편이 병실에서 쓸 짐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혼자 남겨진 그때서야 참 아팠다. 실패의 연속을 겪은 후에 생긴 결실이어서인지 많이 기뻐했던 만큼 더 슬펐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다들 겪는 일이래, 두세 번 겪는 사람들도 있어, 초기에 그런 일은 흔하게 있는 일이야, 그러니 깊게 생각하지 말고 너도 힘내.", "나도.. 두세 번 겪었던 일이야." 


그렇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나에게 겨우 건넨 위로의 말일지도 모른다. 보통의 경우 초기 유산은 그런 위로가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새 생명이 주는 의미와 위로가 너무나 컸고, 실패와 상실에 대한 회복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런 위로조차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일을 계기로 진정한 위로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다. 때로는 상대방이 어떤 마음 상태에서 겪게 된 일일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침묵 속에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가장 힘이 됐던 말은 이것이었다.            


"그래, 많이 슬프고 힘들지..?"       

"남들은 별 것 아니라고 하니 슬프다고 말을 하기도 쉽지 않고.. 마음이 너무너무 아프지? 실컷 울고.. 따뜻한 밥 잘 챙겨 먹고.."                


그래 힘들지? 따뜻한 밥 잘 챙겨 먹고.. 마음껏 울었다. 


내 마음의 실체를 마주했다. 내가 슬펐던 건 단순히 유산을 겪었기 때문에 아니었던 것이다. 그간 잘 풀리지 않았던 내 삶의 여정들 속에서 찾아온 기쁨이었기에 기대감이 컸던 것이었다. 왠지 내가 하는 일들이 잘 안 되는 것만 같고, 실패를 연달아하던 내게도 드디어 잘 되는 일이 있구나, 이제는 좋은 일들이 일어나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던 중 다가온 상실이었기에 몇 배나 더 허무하게 느꼈던 것이다. 


실컷 울고 나니 이제야 마음속에 남아있던 푸른이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아, 나에게도 좋은 날이 오는구나, 나에게도 좋은 일이 일어나는구나 생각했다가도, 삶이란 것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내가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만남과 이별의 날, 


그렇게 새 생명 푸른이는 우리에게 환한 웃음과 아픈 눈물을 함께 남기고 떠났다.     

하늘로 저 하늘로 예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햇살 속으로 떠나갔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기를 바랐던 마음의 상실도, 함께 씻겨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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