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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열두달 Oct 18. 2023

나의 상경 일지

얽힌 삶의 노선도에 멈춰 서다

길은 많다. 

어떠한 길을 찾아가기란 한 가지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고, 지하철을 타고 갈 수도 있고, 걸어가거나 택시를 탈 수도 있다. 

한 때 나는 내 삶에는 한 가지 방향의 길만이 있다고 믿었다. 




대학 졸업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쓰고 가족들과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는 어느새 1년에 한 번 암 재발 여부에 대한 검사를 받으러 가는 정도로 점차 건강해지셨고, 대학 졸업식날 우리는 다시 다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투병 기간에 대해서 이젠 서로 이야기를 조금은 꺼낼 수 있을 정도로 각자의 마음이 회복되고 있었다. 


이젠 큰 걱정도 없고, 하던 공부를 마저 하고, 목표하던 대학에 가서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면 그저 괜찮은 인생이라 생각했다. 내가 그린 인생 계획에서 대학까지는 가서 졸업을 했지만, 막상 뛰어든 취업 준비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서류는 잘 통과하더라도, 나를 말로 잘 표현해 본 적이 많지 않았던 나에게 '면접'은 아무리 준비해도 어려웠다. 조금만 당황하면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말들이 튀어나오곤 했다. 그렇게 서투른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부터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서 드디어 나는 서울의 한 공기업의 인턴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평생을 살아온 곳을 떠나 몇 주만에 갑자기 예상치 못한 상경을 하게 된 것이다. 부랴 부랴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 갑작스럽게 올라와 5평짜리 방을 구하고, 생활용품과 이불 등 생활 용품들을 사 와서 방을 채워나갔다.


다시 집으로 가셔야 하는 부모님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셨던 것 같다. 내가 출근한 사이 집을 한 번 더 정돈해 놓으신 후에야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서울 쪽에도 취업 지원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셨던 부모님은 내가 평생 살아온 부모님 집에 쭉 살다가, 그 언젠가 결혼하면서 독립을 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만큼 서로 취업 준비에 대한 이야기는 잘하지 않았기에 내가 고민하고 준비하는 것도 잘은 모르셨을 것이고, 그래서 예상을 잘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대학 졸업 후 20대는 서울에서 보내게 되었다. 사투리가 센 지방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사람들의 부드러운 억양과 친절해 보이는 모습만으로도 왠지 좋아 보였다. 높은 건물들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도 멋지게 보였다. 그 틈에 함께 떠밀려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회사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는 것도 보통의 멋진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만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새로운 문화와 체계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몇 개월이 흘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퇴근을 하고 나면 집에서 불을 끄고 잠을 자지 못했다. 그건 어디서부터 온 불안이었을까? 깜깜한 5평짜리 방에 누워있으면 몸은 피곤하지만 잠은 더욱더 들지 않았다. 결국 불을 켜고 앉아서 내 마음과 생각에 대한 일기를 쓰곤 했다. 


그랬다. 해야만 하는 것들을 잘 해내는 삶이면 충분하다고, 주위 사람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면 충분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열심히 따라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뭔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생각'을 할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 그런 마음의 틈새가 생긴 것이었다. 갑자기 들기 시작한 생각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 지 생각은 급격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다만 월세는 꾸준히 내야 했고, 갑자기 그만두고 이 생각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 중 나는 기존과도 같이 '안정감'이라는 카드를 선택했고, 나는 퇴사를 하고 만나오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함과 동시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선택은 반복되었다. 서울에서 같이 맞벌이를 하면서도 어느 정도 안정감 있게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일, 규율을 따르고 조용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라는 이유로 '공무원'이라는 방향을 다시 선택하게 되었다. 그렇게 '왜'이 선택을 하는지에는 '나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여전히 빠진 채 그렇게 매일매일 가방을 메고 책을 챙겨 독서실로 향했다. 


매번 불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고 다시 독서실로 향하기를 3년이 걸렸다. 3년을 매달렸지만 수험생활의 가장 큰 결실인 '합격' 통보는 끝끝내 받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실패감과 무기력함 속에서 다시금 방향을 잃고 말았다. 내가 생각한 내 삶의 최적의 방향은 이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최적의 방향으로 향하는 도로가 끊긴 기분, 같은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성취해 낸 이들에 비하면 나는 부족하고 실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인턴 생활을 열심히 하던 곳에서 퇴사를 하고 공부만큼은 자신이 있다며 해보겠다던 나였다. 그런 3년 동안 시간을 들인 수험 생활을 '실패'라는 마침표로 마무리하기엔, 가족들을 보기에도 면목이 없었다. 


그 때로부터 시작된 '실패'에 대한 생각들, 무기력함은 지독하게 나의 내면에 깊숙이 '우울감'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방향을 알지 못한 채 직진했던 나에겐 그 길이 끊겼을 때의 기분이란 곧 인생의 실패처럼 느껴졌다. 다른 방향은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무기력함이 나를 지배했다. 얽힌 노선도에서 어느 쪽으로도 향하지 않고 멈춰서 있던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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