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너였는데
그토록 바라던 것도
막상 이루고 나면 별게 아닌 것이 될 때가 있다.
한껏 기대하던 것이 막상 내 것이 되었을 때,
이전의 마음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서
나타나곤 한다.
상실의 아픔을 딛고 다시 찾아온 소중한 '푸른이'
유산을 겪고 시간이 흘러 다시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다.
출산 전 우리는 서울 외곽 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남편의 출퇴근 거리는 멀어졌고 신생아 육아는 거의 대부분 나의 몫이 되었다.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나와 푸른이는 항상 자고 있었고, 새벽 6시에 남편은 출근 준비를 하고는 깜깜한 겨울 새벽에 집을 나서곤 했다.
힘든 일 뒤에 찾아온 아이였기에 나는 육아에도 참 많은 마음과 헌신을 쏟았다. 멀리 계시는 양가 부모님과 친구들, 그리고 아직 아이를 낳지 않은 지인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나는 대화다운 성인들 간의 대화를 거의 하지 못하고, 아이를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코로나가 극심했던 시기였던지라 많이 들어왔던 조리원 동기 모임, 문화센터 수업 등은 머나먼 이야기였다.
그렇게 나의 '고립육아'는 길어졌다. 잠귀가 밝은 아이라, 조그마한 소리에도 쉽게 깨곤 했고, 나와의 교류가 거의 전부였던 아이라 주말에만 잠깐씩 만나는 아빠에게는 낯을 가리기도 했다. 몸이 편하지 않은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기도 쉽지 않았고, 원체 도와달라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나였다.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아이가 자랄수록 예쁜 행동과 말은 많이 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말속에 짜증과 화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육아에 서투르거나 아이를 잘 케어하지 못하는 남편에게도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육아에 대해 지적을 하거나, 아이가 엄마만 찾는다는 이유로 나에게 대부분의 아이 케어를 하기를 바랄 때면 화가 나곤 했다.
취업과 수험 생활의 실패와 유산, 그 후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였는데, 막상 아이가 태어나니 아이가 예쁜 것과 함께 찾아오는 힘든 상황에 압도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때 당시에는 '산후우울증? 힘들겠다, 심각한 상태인가 보다'하며 다른 사람들의 일로만 생각했다. 내가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체력이 부족하고, 다 소진되어서 힘든 것이지, 산후우울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우울감이란 침체되고 가라앉고 슬픈 감정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쉽게 감정 조절이 되지 않고, 갑자기 눈물이 나거나 화가 나고, 짜증이 나거나 하는 감정도 우울감의 일종이었던 거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고 나서는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도움 구하기'를 시작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동안은 장거리로 출퇴근하면서 지친 남편에게 미안해서 도움을 구하지 않았던 것들도 작은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감정의 상태를 알렸다. 감정을 모두 받아준다거나 일방적으로 이해한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남편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게 되면 적어도 내 말과 행동, 감정의 이유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혼자서만 감당하던 육아에서 벗어나,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저녁에 단 30분이라도 저녁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정돈하고, 앞으로 준비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준비하면서 그렇게 서서히 나의 우울감은 옅어져 갔다.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산후우울증, 그것은 나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해결할 길이 보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고 되찾았다.
푸른이의 손짓, 발짓, 크고 작은 웃음이 너무나 귀하디 귀하고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