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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혜 Aug 19. 2020

'아버지'에 관한 사색3-한심종자라 생각했는데


난 아버지가 화장실 다녀와서 손을 안 씻는 게 싫다

화장실 문 열어놓고 혼자 담배 피며 볼일 보는 것도 싫다

쩝쩝거리며 밥 먹고 식탁 한 번 안 치우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혼자 리모콘 틀며 티비 보다 자는 것도 싫다

퇴직금을 다 털어넣어 가게를 차린 뒤에 가족들에게 돈을 얼마나 빌렸는지, 그리고 갚지 않았는지 생각하면 억한 심정이 된다.

사업가라면 응당 제 몸 관리에 힘쓰고 자기가 뭘 연구하고 탐구해야 하는데  매일 술 마시는 데나 열심이고 휴대전화 문자도 카톡도 사용할 줄 모른다는 점이 못 미덥다

매달 나오는 연금을 고스란히 혼자 다 쓰면서도

엄마에게 생활비 한 푼 주지 않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엄마가 밥 차려주고 시중 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가증스럽다

밖에서는 호인이지만

안에서는 자기 할 일도 미루고 크고 작은 사고들을 친 뒤 각종 뒷처리는 엄마나 자식에게 나몰라라 맡겨버리는

모습들도 너무너무 싫다


그러나 그는 언니와 나를 나은 사람이고

 동생들을 셋이나 더 나은 것에도 모자라서

집 안에 십 여마리의 고양이들을 풀어놓고 기르는 것을 보며

저 사람은 과연 무책임한 한심종자인지

세상에 많은 생명체를 내보내는 데 탁월함을 가진 사람이라 평가해야 할지  헷갈리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그에게서 후자의 면모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낮에

식용유를 사러 갔다 오는 길에

아파트 마당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걸 보았던 것이다.


다행히 머리가 깨지거나 창자가 튀어나오진 않았지만

차에 받쳐서 죽은 게 분명한 새끼 고양이는

한여름 뜨거운 태양열에

옆으로 누운 채 바닥에 눌러 붙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그런 걸 보는 것을 극혐한다.

은근히 뽀시라운 사람이 나다.


스스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여긴 적도 있었지만

나는 그릇이 작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사랑 받을 짓을 하는 상식적인 대상에게만 사랑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파트 마당에 고양이가 죽어 있어요"

라고 하자마자

'검은 비닐봉지 하나 준비하라'고 하며 장갑을 꼈다.


의롭다 여겨지는 일에 고민 없이 바로 행동으로 나서는 이 ...

궂은 일에 강한 사람...


순간 그런 사람의 면모를 아버지에게서 발견했다.


나는 비닐봉지와 신문지를 챙겨서 아버지에게 드렸고

두려운 마음을 감추며 쫄래쫄래 아파트 마당으로 따라나갔다.


아버지는 한치의 고민 없이 장갑으로 죽은 새끼 고양이를 들어올린 뒤 신문지에 고양이를 둘둘 감쌌다.

고양이는 깃털마냥 가볍게 들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신문지로 고양이를 감싸는 솜씨는

신속하고 정확했다.

나는 두 가지 모두를 목도하며 내심 놀라워했다.


나를 벌벌 떨게 하는 궂은 일 앞에서

의연하게 고양이를 처리한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뒷마당으로 걸어가

텃밭을 가꿨다.


저런 의연함을 가진 사람이 내 아버지라니!


내공 깊은 무림 고수 같은 느낌으로 아버지를 잠시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그런 사람이다...

한심종자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64년간 모진풍파를 겪어낸 내공이 있기에

말뿐인 나보다 실제로 행동하는 힘은 더 큰 사람..



무림 고수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고도 나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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