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설 Oct 01. 2024

딸에게 보낸 카톡  그리고 미발송

매일 꿈꾸는 너에게






지야. 꿈에 대해 고민하는 너를 보니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네. 왜냐하면 조금 섣부른 판단이었는지 몰라도 엄마는 네가 어느 정도는 꿈에 가까이 가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너는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쳤던 아이였지. 그것도 무려 중학교 2학년 때. 그때 엄마는 너의 그 철없음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 컸었고 그러면서도 저렇게까지 당차게 자기 꿈을 말하다니, 놀랍고 기특했었어. 너는 결국 그림을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되었고 꽤 흡족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꿈에 대한 고민을 한다고 하니 아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아. 생각해 보니 꿈이라는 건 여러 번 꾸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바뀌기도 하는 건데 말이야. 꿈이 이루어지면 만족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꿈을 꾸는 사람도 있을 거니까. 반면에 꿈을 원대하게 꾸지 않고도 즐겁게 생활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엄마와는 달리 너는 너의 삶을 주도하려는 마음이 큰 사람 같아. 멋있다. 딸.

















너와 을 끝내고 자려고 누우니까 엄마 어릴 적의 일이 생각나더라. 그때의 일을 너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어. 이런 이야기 처음 하는 것 같네.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어. 그날은 등교하기가 싫었어. 등교가 싫었다기보다는 영어 수업 시간이 싫었어.  이제 막 알파벳을 배우고 가까스로 발음기호를 외워 더듬더듬 읽기를 시작한 학생들에게 부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팝송을 함께 듣고 가사를 해석해 오라는 숙제를 내준 선생님이 미웠거든.  이런 어이없는 일로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억울했어.  지난 일주일 동안 영어 가사를 써주지 못한 부모님을 몰래 원망했고 그래도 숙제를 안 했다고 결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았지만. 선생님이 나한테 발표를 시키면 어쩌나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 선생님은 숙제를 못 한 학생이 있을 거라는 걸 짐작했는지 자발적인 발표를 선택하더라. 가장 먼저 손을 든 반장이 능숙하게 영어를 읽기 시작했어.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발표가 끝난 뒤 영어 선생님과 반장의 대화가 이어지던 중 나를 놀라게 한 건 반장의 마지막 말이었어.  이렇게 좋은 팝송을 알려준 부모님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며 부모님처럼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얘기였어.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가히 그날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야.  '다른 집은 이렇게 엄마가 영어를 잘하는구나.. 하는 자각.  부모님과 영어 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듣기도 하는구나.  세종대왕도 아니고 이순신 장군도 아니고 에디슨도 아니고 퀴리 부인도 아닌 부모님을 존경하고 본받고 싶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게 된 거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날 이후로 부모님에 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던 것 같아.  


지야 그 당시 엄마는 할아버지가 제발 빨리 들어오기를 바라며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어. 작은 소리에도 잘 깨서 새벽에 들어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싸우는 소리를 엿들었어.  그런 밤이면 영락없이 탱크가 집 안으로 들어와 모든 살림을 파괴하는 꿈을 꾸곤 했지. 엄마는 언제나 전쟁의|포화 속에 놓인 것처럼 불안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신들이 그렇다는 걸 알아서인지 계몽사 세계문학전집,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위인전집 같은 걸 방에다 들여놔 주셨지. 그걸 읽으면서 나는 점점 침울해졌어.  책 속 위인들은 나의 롤모델이 돼줄 수 없더라고.  그들의 존재가 지나치게 거대했기 때문일 거야.  나는 이순신 장군처럼 용감하지도 못하고, 세종대왕처럼 똑똑하지도 끈질기지도 못했고. 에디슨처럼 엉뚱하지도 못했고, 신사임당처럼 다재다능하지도 못했으니까.  그러면서 위인전과는 차츰 멀리하게 되었어.  나는 롤모델 찾는 일에 실패했고 롤모델 같은 건 없이 몸집만 커졌어.  그 시절, 장래 희망은 막연하게 화가가 되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없었어.  시간이 지나고 보아하니 화가는 어렵겠다 싶었고 차선책으로 항공운항과에 들어가 스튜어디스가 된 다음 빨리 집을 떠났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아.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막연히 그렇게 될 줄 믿고 있었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는지 할머니는 간혹 엄마에게 "넌 뭐가 될래?"하고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다 큰 어른처럼 심드렁하게 취직이나 하지 뭐, 친구에게 말하듯 무심하게 대답했지. 커서 반드시 무엇이 되고 싶다던가, 어떻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놀라울 수가 없더라고.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되고 싶은 게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닮고 싶은 사람이나 꿈은 없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 아이로 자랐지. 낯을 가리긴 했어도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성격을 다듬을 줄 알았고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는 머리가 닿지 않으면 몸을 써서라도 해결하는 사람이 됐어. 게으르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고 지금 주어진 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어. 어쨌거나 삶이라는 게 주어졌으니 열심히 그 길을 걸었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과 불운을 온몸으로 맞서며 간혹 마주치는 사소한 기쁨에 의지한 채 작은 성취를 쌓아가면서 그렇게 살았어.










반평생을 이루고 싶은 꿈 없이 살다가 쉰여섯이 됐는데 이 나이에 꿈이 생기고 말았어, 꿈이 긴 장소는 엉뚱하게도 수영장이야. 한때 엄마가 아쿠아 에어로빅을 했던 거 알지? 그걸 배우는 수업시간이었어. 엄마가 수업을 하는 시간은 오전 클래스였는데 그 시간에는 온통 할머니들 뿐이었어. 할머니들은 찐찐찐찐 찐이야 노래에 맞춰 격정적으로 춤을 추셨는데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수영장 물이 미지근해질 정도였어. 물속에서 춤을 추는 할머니들은 행복해 보였고 무엇보다 건강해 보였어. 탈의실에서 못을 갈아입는 것조차도 불안해 보이던 할머니들은 온데간데없이 다들 물속에서 펄펄 뛰는 인어공주들 같았지. 한 시간을 물속에서 운동하고 기진맥진한 나와는 달리 할머니들은 숨조차 헐떡이지 않더라니까.  다들 물에 지워지지 않는 화장품을 바르셨는지 화장도 지워지지 않은 채 싱그러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계셨어.  수영장에 화장하고 오시는 할머니들이라니 참으로 신비로운 광경이었지.  나는 할머니들을 보며 종종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어.  늙는다는 무상함을 무색게 하는 할머니들의 발랄한 모습이 왠지 사무치고 뭉클하더라고.  

소녀들처럼 물장구를 치면서 까르르까르르 웃어젖히는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수영장에 가득 차는 걸 보면서 생각했지.  '아 이 할머니들처럼 나이 들고 싶다. 그날 이후 엄마는 나와 잘 노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어.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뭘 하고 하루를 재미있게 보낼까, 그 생각부터 한다니까.


얘기가 좀 길었지?  오늘은 여기까지. 끝!!!

이전 02화 딸에게 보낸 카톡 그리고 미발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