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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Sep 20. 2024

딸에게 보낸 카톡 그리고 미발송

어두운 방 편





지- 엄마, 나는 어두운 방에 있으면 예전 우울증이 심할 때가 생각이 나. 가끔 집에 와서 작은 방에 누우면 이 방이 나에게 무슨 저주를 걸어버린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어. 잠도 안 오고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날 때도 있어. 엄마가 슬퍼할까 봐 이런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다 해버렸네. 그런데 엄마도 알지? 이제는 괜찮아졌으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라는 걸. 엄마. 나 이젠 정말 괜찮아.



설- 그랬구나. 사실 엄마도 네가 생활하던 작은 방에 들어가면 마음이 좀 그래. 지금은 아빠가 그 방을 쓰고 있잖아. 얼마 전에 아빠도 그 방에 누우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라. 이 방은 어째 찜질방 수면실 같아.라고. 내 딸이 그 어둡고 좁은 방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우울과 불안에 괴로웠을까 생각하며 좀 슬펐어. 네가 독립을 결정하고 자취방을 보러 갔을 때 기억나? 너는 몇 군데의 오피스텔을 봤으면서도 선택의 고민도 없이 금방 한 군데를 정해버리더라. 내가 그때 물었잖아. 왜 여기로 정했냐고. 나는 너의 대답을 잊을 수가 없어.


햇빛을 가리는 건물이 하나도 없잖아. 아무것도 이 창문을 막지 않잖아. 봐바 엄마. 엄청 환하지?




좋은 일이 직진으로 들어올 것 같은 너의 창가에서














발송하지 못한 긴 메시지.




그날 엄마는 짐 정리하는 걸 봐주고 돌아오는 길에 운전대를 잡고 끅끅 울었어.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원하는 회사에 취업도 하고 혼자 살아보겠다며 살림살이를 정리하는 네 뒷모습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었나 봐. 기특하고 착한 딸. 사랑해. 이젠 아픈 기억들 다 잊고 즐겁게 살아. 어두운 쪽은 되도록 돌아보지 말고.



지야. 얼마 전에 우연히 김사인 시인의 중과부적이라는 시를 읽었어. 시는 눈물 버튼이더라고. 힘든 시절의 기억은 가슴에 새겨지는 건지 상황이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 옆스쳐 지나가도 시절이 떠오르고 무슨 버릇처럼 시의 구절을 입으로 웅얼거리게 되는 거야. 그리고 이내 눈물이 나는 거지. 그래 엄마 주책바가지 맞네.




조카 학비 몇 푼 거드니 아이들 등록금이 빠듯하다.

마을금고 이자는 이쪽 카드로 빌려 내고 이쪽은 저쪽 카드로 돌려 막는다. 막자.

시골 노인들 팔순 오고 며칠 지나 관절염으로 장모 입원하신다.

다시 자동차세와 통신 요근 내고 은행카드 대출할부금 막고 있는데 오래 고생하던 고보부고 온다.

 문상 마치고 막 들어서자. 처남 부도나서 집 넘어갔다고 아내 운다.

젓가락은 두 자루, 펜은 한 자루.... 중과부적.이라 적고  마치려는데 다시 주차공간미확보과태료 날아오고

치과 다녀온 딸아이가 이를 세 개나 빼야 한다며 울상이다.

철렁하여 또 얼마냐 물으니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성을 낸다. [김사인]





그 시절에는 참 억울했던 것 같아. 사는 게 왜 이렇게 쉽지 않지?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며 살지?  친구 자식들은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 먹이며 남부럽지 않게 키우는데 내 능력은 왜 이거밖에 안 돼서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에게 환한 방 한 칸 주지 못하지? 내가 무슨 허영이나 사치를 부려 가난하게 사는 거였다면 내 탓이다 하며 참고 살 텐데 싶고.... 인생이 무슨 골키퍼 포지션을 맡은 것처럼 날아오는 공을 이리 막고 저리 막아도 도무지 경기는 끝이 안 나는 것 같더라. 최종 수비수 역할을 해줄 남편은 엘로우 카드를 받아 퇴장한 지 오래고 고생 끝에 낙이 올 거라고 믿고 참자 하니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막막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내가 감기 몸살을 앓던 날이었을 거야. 고열에 들떠 정신이 오락가락했었지. 엄마의 이마에 수건을 적셔 올려주던 너의 고사리 같은 손을 느끼며 왠지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 같아. 열심히 살자. 불평하지 말고 더 용감해지자. 힘내서 살자. 내 삶을 허무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 딸까지 허무한 인생의 소용돌이에서 함께 허우적거리게 된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날 이후 엄마는 열심히 먹고 열심히 걷고 열심히 자고 열심히 울고 열심히 웃고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 어느 날 문득 그런 나를 멀리서 보니까. 스스로가 참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당시 엄마에게는 당신은 장한 사람입니다 라는 칭찬 한 마디가 절실했던 시기였으니 스스로에게 한 칭찬이 얼마나 다디달았겠어.

아무튼 엄마는 밥벌이의 숭고함이랄까 일의 본질 같은 걸 생각하면서 힘든 시기를 더듬더듬 지나온 것 같아.

지야. 너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야. 수많은 물음표가 너의 뒤를 쫓는 기분이 드는 날. 일하는 너에게 자기 연민이 생기고 직장 생활은 이렇게 비굴한지. 사는 이러냐고, 바쁘게 일만 하면 진짜 삶은 어디 있냐고 반문하게 되날이 수도 있어. 죽어라 일하는데 통장의 돈을 늘지 않는지. 모은다고 모으는데 장만은 멀어지기만 하는 건지. 그럴 때 엄마가 해줄 게 뭘까. 아파트 한 채를 만한 재력이 있는 부모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 테니 그건 애당초 포기했을 거고, 뭘 해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 결국 말 뿐이네.


지야. 삶과 일은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같이 굴러가는 거거든,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는 거지. 삶에도 일에도 양면성이라는 게  있어. 보람이 있는가 하면 힘이 들고 즐거운가 하면 지긋지긋하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거 같다가도 어떤 때는 노예가 된 거 같고 취업이 안 되면 죽을 것 같다가도 막상 일을 시작하면 몸이 녹는 것처럼 피곤하고. 그런데 지야. 사는 건 원래 그런 거 같아. 좀 맥 빠지는 이야기 같지만 삶과 일이란 원래 그런 것 같아. 그러나 원래 그런 게 삶이고 일이라고 해서 힘들고 재미없게 사는 게 당연하다는 뜻은 아니야.


삶과 일이 고통으로만 여겨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데 너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더라?

시간이 나면 과자를 굽고 빵을 구워 예쁘게 플레이팅 해서 먹고 남는 건 하나씩 포장해서 팀원들에게 나워 주는 너에게 엄마가 물었었잖아? 주말에 그냥 쉬지 왜 사서 고생하냐고. 빵이 먹고 싶으면 맛있는 빵집에서 사 먹는 게 낫지 않냐고. 나의 우둔한 질문에 너의 대답은 참 인상적이었어.


"엄마. 나는 내가 먹고 싶어서 만들고 장식하고 플레이팅을 하는 과정이 흥미롭고 즐거워서 베이킹을 해. 이 시간이 나에게 행복을 줘."


지야. 엄마가 56년을 살면서 깨닫그래 바로 그거야. 삶과 일에 창의성과 욕망이 빠지면 단팥 없는 찐빵이 되고 속없는 만두가 되는 거더라. 자신에게 발견할 수 있가장 존엄한 인간의 모습이 그건 아닐까? 뭔가를 이루려는 욕망과 그걸 실현하기 위해 발휘하는 창의력 그것만 있다면 힘든 삶도 일도 조금 재미있어지는 같아.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앗! 재밌게 살다 보니 세월이 이렇게 금방 가버렸네? 하게 될걸.

앞으로도 재미있는 일 열심히 만들면서 즐겁게 살아. 엄마도 그럴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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