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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Oct 08. 2024

딸에게 보낸 카톡  그리고 미발송

프로계획러 편








지- 엄마 나는 계획을 너무 많이 세우는 것 같아. 그것 때문에 피곤해 죽겠어. 일상이 다짐의 연속이랄까.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다짐을 시작해.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고 너무 그러지 말자고도 다짐하고. 머리로만 다짐하는 걸로 부족한 건지 다이어리에 다짐한 걸 쓰기까지 하고, 쓰면서 다시 다짐을 하는 패턴. 무슨 말인지 알지? 깨알같이 써놓은 걸 보면 이건 무슨 강박일까 아니면 불안인가 싶고


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사는 게 재미없다거나 뭐든 심드렁하거나 아침에 눈을 뜨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거니?


지- 아니, 그런 건 아냐. 오히려 반대에 가까워. 재밌다고 느끼는 일이 너무 많아서  하고 싶은 일도 먹고 싶은 것도 많아. 얼마 전에는 내년 계획을 미리 세웠는데 운전면허를 따고 JLPT 시험도 보겠다고 적어놨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다짐하는 시간을 자주 갖다 보니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특히 즐거움을 모른 척하고 진지하게만 사는 건 아닌지. 계획을 세우는 건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거기에 완전히 매몰되는 것 같고. 삶의 균형을 어떻게 만들지 모르겠어. 아 너무 어렵다. 엄마.


설- 딸! 너 너무 마음이 급한 거 아니니? 아니면 욕심이 많거나. 엄마는 이 나이가 돼서도 갈팡질팡하고 살아. 엄마 mbti 알지? 몇 번을 해봐도 명백히 j로 나와. 엄마야 말로 계획 세우기가 천성인 사람이지. 56년을 사는 동안 무수히 많은 계획을 세웠지만 계획대로 되는 건 많지 않았어. 계획이나 다짐 따위, 다 부질없는 거 아닌가 생각한 적도 많았는데 돌이켜 보니 그 과정도 의미 있는 일이었더라고.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하면서 너 자신을 궁금해하면 좋을 것 같아. 나는 어떤 사람인가, 뭘 원하는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아무튼 우리 모녀는 진지한 탈인 거 알지?오늘 하루만큼은 어떻게 하면 진지함을 빼고 즐거움만 누릴까 그것만 생각하자. 나도 그럴게. 출근 잘해. 











그리고 미발송



지야, 엄마는 어제 러그를 꺼내 거실에 깔고 속커튼만 달아 뒀던 거실창에 도톰한 겉커튼을 달았어. 낡아서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는 오래된 에어컨에도 하얀 옷을 입히고 옷장을 뒤적여 겨울 옷을 꺼내 여름옷과 자리를 바꿔주고 양말도 계절에 맞게 정리했어. 너도 알지? 계절이 바뀔 때 엄마가 늘 하는 일. 오랜 세월 반복된 일이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계획이랄 것도 없지만. 엄마는  이 사소한 생활 패턴도 언제, 구체적으로는 며칠 날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걸 보면 참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나 싶어.



어제 입힌 에어컨 옷


네가 며칠 전에 했던 말 말이야. 그 다짐에 관해 생각해 봤어. 그때 엄마가 사는 게 재미없냐고 물었었지? 그 질문을 왜 했냐면 엄마의 경험상 삶이 재미없을 때 습관처럼 다짐을 했기 때문이야. 예전의 엄마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못하는 사람이었어. 단순히 직업이나 꿈 말고 존재적 차원에서 어떤 사람이 되려는 건지를 물으면 아무 생각이 안나더라고. 한참 힘든 때였으니까 고작 한다는 대답이 돈 많은 사람? 평소에 나에게 그런 질문을 안 했던 거지.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까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고 살았더라고. 나에 대해 생각한 게 별로 없어서 그런지 자꾸 남을 바라보게 되거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더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한 거지. 그러나 비교의 악몽이 시작되었을 뿐, 본다고 알게 되는 건 아니더라고. 나도 모르겠고 다른 사람을 봐도 모르겠고 그러니 사는 게 너무 막막하고 미래가 캄캄한 거야. 그러니 다짐이라도 열심히 해서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에게 위안을 줬던 건 아닐까.


엄마는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나를 향해 걷는 일인 것 같아. 솔직히 지금도 어렵지만 그때는 말해 뭐 하겠니. 여러 핑곗거리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핑계에 불과하고 명백하게 지적인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네. 한마디로 탐구 정신의 부족이지 뭐. 나를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전략을 세우고 하는 일이 귀찮고 힘드니까 남이 만들 걸 따라 하면서 살게 되더라. 인간은 누구나 어느 단계에 가면 지적으로 게을러지게 되어 있는 것 같아. 뭔가를 열심히 배우다가도 어느 정도 성취를 맛보고 나면 슬슬 게으름이 발동한 경험, 누구라도 있을 걸. 수고하는 것도 습관이 들어야 하는 데 엄마는 그게 없었던 거지. 아무튼 자신을 탐구한다는 건 수고가 많이 들어가는 일임이 분명해. 게으른 사람의 선택은 비슷해. 그럴 듯 해 보이는 누군가의 전략을 따라서 수행하는 거야. 성공 확률이 높아 보이는 사람을 따라 살았으니 결과를 낙관하는 건 당연했지.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은 다짐을 했던 때가 다른 누군가를 따라 살던 바로 그때였. 매일매일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다짐 또 다짐. 그야말로 공허한 다짐들.


결과는 언제나 매섭고 정확하지. 그 사람의 결과와 내 결과가 판이하게 다른 거야. '어.. 이게 아닌데....'당황스럽더라고. 나는 죽상을 하고 있는데 사람은 에서 빛이 났어. 엄마는 이유를 찾아야 했어. 참담한 결과를 받아 들고서야  비로소 생각이라는 하게 된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의외로 답은 간단했어. 사람은 자기를 충분히 생각한 다음 자기에게 맞는 전략을 스스로 세우고 결과를 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자기의 결과를 만들어 낸 거엄마는 남이 만든 전략을 흉내 내고 몰래 따라 하다가 실패한 거지. 그때 만약 운이 좋아서 성공했다 한들 그걸 나의 노력이고 결과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사실 엄마 마음에 걸리는 건 네 카톡 메시지 중 불안이라는 단어야. 불안 때문에 계획과 다짐을 많이 하는 건 아닌가... 하던 너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몇 마디를 더하고 싶어서 또 안달이다. 너도 알다시피 불안이라는 단어는 엄마의 시그니쳐잖아. 너의 불안이 엄마에게서 간 거라고 확신할 정도로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었지. 한동안은 불안을 이겨낼 도리가 없어서 아예 모른척하려고 입버릇처럼 하던 말도 있었어. '사람이 살면서 마음 편한 게 최고다' 물론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말을 자주 하던 때 엄마는 불안에 지는 사람이었어. 불안이 나를 뒤흔들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지 못했었지. 불안을 이겨낼 힘이 없으니 빨리 없애고만 싶었어. 

지야.... 엄마가 반평생을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며 알게 된 게 하나 있어. 그건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은 없애려고 애쓸 게 아니라 그냥 품고 살아야 한다는 거야. 엄마처럼 무서워만 하지 말고 불안이라는 감정을 잘 들여다봤으면 좋겠어. 반갑지 않은 이 불안이라는 놈은 어디에서 왔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 거지.  어느 순간 불안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불안이 서서히 작은 덩어리로 변하고 상대적으로 네가 커져. 네가 커지면 너의 시선도 당연히 높아지겠지? 그다음은 예상하는 대로야. 너는 그때부터 다른 높이에서 네 삶을 운용하게 될 거고 불안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여기까지 써 놓고는 엄마는 또 생각이 많네. 어디선가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당장 불안하다는 데 엄마는 그걸 방법이라고 알려주는 거야!?'


하하하. 엄마가 또 말이 길었지? 오늘은 여기까지, 끝!(줄행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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