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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Oct 15. 2024

딸에게 보낸 카톡 그리고 미발송

여자와 결혼 편



지- 엄마 혜련이 알지? 걔가 가을에 결혼을 한대?


설- 뭐라고?? 이렇게나 갑자기? 원래 결혼 계획이 있었던 거야?? 걔 정말 일찍 결혼한다. 스물일곱에 결혼이라니, 엄청 마음에 드는 상대였나 보네. 걔네 엄마도 사윗감이 정말 마음에 드셨나 보네.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면.


지- 주말에 걔가 웨딩 사진을 보여줬는데 기분이 이상한 거 있지. 좀 믿어지지가 않고 꼭 장난하고 있는 것 같아. 남자 친구랑 웨딩드레스 빌려 입고 무슨 이벤트를 하는 건가 싶고, 근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웨딩드레스와 턱시도가 완전 정석이더라고. 사진을 보고 웃음을 못 참겠더라. 그때 우리, 나름 어려운 관문을 뚫고 예술고에 진학하고는 어설픈 예술혼에 불타고 있을 때 만났거든. 그림이 맘먹은 대로 그려지지 않는다며 매일 울고 짜고 이래 가지고 뭐가 되겠냐며 대학엔 갈 수 있을까 하면서 같이 신세한탄도 하고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작업실에서 치킨 시켜 먹고 낄낄대고, 그러다 둘 다 살만 뒤룩뒤룩 찌고. 그 살이 대입 시험 볼 때까지 안 빠지고  암튼 그렇게 철부지 같던 애가 신부 화장을 하고 웨딩 사진을 찍어서 보여 주는데 내 맘이 다 이상하더라니까.


설- 근데 혜련이 정말 용감하다. 신랑 될 사람이 그만큼 믿음을 주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즘 같은 세상에 결혼 결심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말이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님 임자를 만났다고 해야 할지. 암튼 엄마도 축하한다고 전해줘. 알콩달콩 잘 살라고 덕담도 해주고.

그런데 지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넌 결혼한다는 친구가 부럽지 않아? 남자 친구 사귀고 싶은 마음 없어?


지- 엄마 나는 엄마가 이 질문을 왜 하는지 잘 모르겠어. 지금 내가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가 나에게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잘 들어 엄마. 난 우선 이성에게 관심도 없지만 겁도 많아서 연애를 쉽게 못해. 연애로 시간을 쓰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무리고 하고 싶은 게 진짜 많고 현실적으로도 너무 바빠서 일 마치면 집에 가서 쉬기 바쁘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없어. 그러니 엄마 당분간은 딸에게 남자 친구의 존재 여부를 묻지 말아 줘.


설- 아이고, 알았어. 누가 뭐래니? 난 억지로 남자 친구 사귀라고 말 안 했다. 피곤하겠다. 얼른 퇴근해. 그나저나 저녁에 운동할 시간도 없겠지? 옛날 엄마 어릴 때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있었어. 크크크


지- 으이그 엄마!!!!










그리고 미발송



지야. 엄마는 혹시나 그래. 혹시나 엄마의 결혼 생활을 봐왔던 네가 결혼에 대한 혹은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게 아닌가. 엄마는 도둑이 제 발 저린 마음이 있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아빠랑 하구 헌 날 다투고 이혼했다 다시 재결합했다. 그야말로 난리 부르스였잖아. 그런 걸 오래 지켜본 딸들은 대부분 결혼에 회의적이라는 말을 들었어.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고. 혹시나 그래서 남자 친구나 결혼을 거부하는 거라면 엄마가 참 미안하네.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엄마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내 딸이 단 한 번도 연애를 안 하는 이유가 뭘까? 혹시 여자 좋아하나? 뭐.. 그런 생각도 해봤다규, 크크큭.


지야. 엄마가 알기로는 인간은 참 쉽게 반하는 동물이야. 재미있는 사실이지. 구나 자기에게 많이 그리고 자주 반하는 것 같아. 너도 나도 예외는 아닐걸.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이 적지 않게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거울 속의 자기 몸에 반하고 화장을 끝낸 자기 얼굴에 반하고 면도를 막 끝낸 푸르스름한 자기 턱에 반하고 심지어 자기 마음에게 반한다니까? 그러고 보면 인간의 모든 사랑은 자기 사랑 아닌가 싶어. 언젠가 북토크에서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 엄마 책, 다행한 불행을 가지고 독자를 만나는 자리였지. 그때 어떤 독자 님이 그러더라고 그 자기애가 타인을 향할 때는 좀 다르지 않냐고, 그때도 엄마는 애매하게 글쎄요 라는 말을 했어. 그리고는 조금 후에 대답했지. 나를 사랑하든 타인을 사랑하든 마찬가지 아닐까요? 좀 지나치게 냉정한 답일 수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타인을 사랑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했어. 엄마 대답이 아무래도 너무 매정했던가?

남녀는 반하는 사람들이야. 첫눈에 반했다고는 하나 두 눈에도 세 눈에도 반한다니까. 금사빠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야. 반한다는 건 어떤 존재에게 한 방 얻어맞는 거야. 당신이라는 이미지, 철저히 내가 만들어 낸 이미지에 몸과 마음을 다 얻어맞고 감염되어 본래의 나는 흐려지거나 심지어는 잃어버리는 일이지. 좀비가 따로 없어. 어떤 사람이 퍼트린 바이러스에 감염된 된 사람.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사람이 되는 거지. 마치 좀비처럼.





지야, 엄마는 막상 너에게 애인이 생기고 서둘러 결혼을 결정한다고 나서도 불안할 것 같아. 아마 모든 엄마들 마음이 비슷할 거야.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고 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길 바라지만 부부라는 게, 삶이라는 게 녹녹지 않은 걸 알다 보니 부모로서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아. 그럼 어쩌라는 거냐고? 글쎄다. 그걸 엄마도 모르겠다. 네가 말했었지. 왜들 그렇게 겁 없이 결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결혼이 그렇게 쉽냐고. 설마 쉽게 결정했을라고 나름대로는 많이 고민하고 결정했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사람마다 고민의 깊이와 방향과 시간은 다르니까.


지야. 남자 친구가 생기고 그 남자가 주는 즐거움과 안정감을 알아버리면 구라도 그 방향으로 쭉 가고 싶은 법이란다. 사람들은 말로는 구속당하기 싫다고 하지만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세계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는 것 같아. 이 남자와 함께 할 때야 말로 가장 안전한 세계에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누구나 자기가 하는 사랑은 특별하고 자기에게만큼은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고 결혼을 하는 거지. 엄마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의 삶은 거기서 거기 같은데도, 당사자들은 그걸 몰라. 이를테면 자라에서 파는 옷을 걸치고 내 것은 고유한 것이라고 외친다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입은 옷과 다를 것 없는 옷을 입고서 자기가 입으면 다른 옷이라고 우기게 되는 것과 비슷하달까. 한참 신혼의 단꿈을 꿀 때는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니, 덫에 갇혔느니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지금의 행복이 영원히 갈 걸 믿어 의심치 않기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거 아니겠니. 설사 약간의 의견 충돌이 생기더라도 사랑의 힘으로 충분히 극복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게 돼.



이게 다 엄마의 경험이냐고?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엄마가 연애를 하고 결혼이라는 걸 해보니 그렇더라. 결과라는 것은 희한하게도 원인과는 전혀 상관없이 도출되기도 하더라고. 내 잘못이 아닌 일에서 비롯된 어떤 실패의 영향이 돌도 돌아 마침내는 자신에게 손해를 치는 일도 허다하더라. 좀 억울하지. 그런데 어쩌겠어 인생이라는 긴 시간을 살다 보면 이득과 손해가, 잘한 일과 잘 못한 일이 반복되어 결국은 균형을 이루게 되는 걸, 이 모든 걸 알게 되려면 아직 한참 걸릴 테니 지금 모른다고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어느 날 엄마는 덫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가 한 살 때던가. 이럴 때 마주하게 되는 가장 불편한 진실이 뭔지 알아? 덫울 만든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야. 한마디로 삶의 덫에 갇혀 소중한 인생을 불행하게 보내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국 나였다.라는 진실 앞에서 주저앉았었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없고 너만 내 등에 업혀있더라고. 그제야 내가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말이야. 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라는 노랫말처럼 이별은 쉽지 않아.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아버린 사람은 하나일 때보다는 둘일 때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감정을 잊을 수가 없거든. 그런 감정을 알아버린 사람은 또 다른  대상을 찾느라 혈안이 되기도 해. 어떤 사람은 사랑에 있어 적당히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니까. 아니 그런 사람은 도처에 있어. 그런데 말이야. 이게 누구의 잘못이겠니. 사람이니 사랑이니. 지금도 엄마는 잘 모르겠다.


그리하여 나를 되찾는 일은 어떻게 됐냐고? 그게 말이야. 너무나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더라. 겪어 보니 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더라고. 그런데 그런 위험은 결혼 생활 내내 너무 쉽게 일어났어.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현실을 재구성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기에 내가 나를 속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 같았어. 안 좋은 결과가 눈앞에 닥쳐도 진의를 의심하기보다는 재빠르게 사실로 둔갑시키기 바쁘지. 차라리 그게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니까. 결국 논리 같은 건 없는 사람이 되더라고.









아무튼 엄마가 수많은 좌절을 겪으며 알게 된 단 한 가지는 막막한 곳에서 표류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생활이라는 것뿐이더라.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네가 묻는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항상 막막하지만 오늘은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그건 다름 아닌 이 세상을 살면서 너를 잃어버리지 않고 소중히 지키는 일에 온 마음을 다 쓰라는 말. 세상이 만들어 놓은 여성성이나 관념에 너를 가두지 말고 자유롭게 날아올랐으면 좋겠어. 때로는 세상이 너에게 뻔한 질문을 하거나 정답이 하나뿐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도 갇혀 있지 말라는 것. 어떤 틀에 너를 집어넣고 벗어나지 못하게 하거든 물어뜯으며 질문할 수 있기를 바라. 너의 내면에 대한 권한을 네가 가지고 있기를. 엉뚱한 질문으로 너를 곤란하게 만드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까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엄마는 네가 그런 사람이길 바라. 지야. 모든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사는 거잖아. 자신의 행복에 대한 열정은 느끼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대. 너는 오로지 너의 행복만 생각하길, 아가.... 엄마는 그거 하나면 돼.



오늘도 징글징글하게 긴 글이 됐네.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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