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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Oct 22. 2024

딸에게 보낸 카톡 그리고 미발송

절(사찰)에서 세 시간 편





지-엄마 운동 삼아 또 그 오르막, 가파른 길을 걷는데 거기 절이 있다고 했잖아? 평소에는 절 가까이 가지 않는데 오늘은 좀 힘들어서 절에 들어가 앉아서 쉬었거든, 근데 무슨 기도하는 날이라고 밥 먹고 가라고 붙잡으셔서 처음에는 거절했어.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 한사코 여러 번 권하셔서 할 수 없이 밥을 얻어먹고 왔다!


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마으면 안 먹고 줄행랑을 쳤을 텐데.


지- 덕분에 아주머니, 할머니들한테 무한한 예쁨을 받았어. 절밥 먹고 나물이랑 떡이랑 직접 만드신 조청까지 알차게 받아서 집에 옴.


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 좋은 말씀 많이 듣고 왔어?


지- 아이고 ~ 예쁘다~ 착하게 생겼다~ 젊은 사람이 오니까 좋네~ 어디 살아? 훤칠하네~ 이런 애들이 시집도 간다~ 거의 시간 할머니들의 인생 얘기와 칭찬과 예쁨을 받고 왔어.


지- 그냥 먹고 일어나는 것도 뭣하고 입 다물고 있기가 좀 그래서 나물 맛있었다고 했더니 또 챙겨주셨어. 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가져가서 저녁으로 먹으라고 하시더라. 남은 음식은 내일 도시락 반찬 하려고.


설- 우리 딸은 참 신기해. 할머니들이 불편할 만도 한데, 엄마는 낯을 가려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참 어려운데 말이지. 넌 예전부터 그런 게 참 자연스러워 보여. 엄마는 그런 너를 볼 때마다 내가 딸을 정말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지-오이 무친 거 북엇국, 도라지나물, 깻잎나물 등등, 오랜만에 엄마 밥 먹은 거 같아. 맛도 있었고, 나는 할머니들이 불편하지는 않아. 할머니들은 신기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또 어디 가서 듣기 힘든 이야기들이거든. 그런 이야기 들으면 진이 빠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 이야기도 있어서. 나는 나쁘지 않아.


설- 일요일을 정말 알차게 보냈네. 기특해 우리 딸.





사진을 보니까 배고프네

















그리고 미발송





지야 네가 엄마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로부터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거든, 그 사람의 이야기가 현재 자신의 관심사가 아닐 때는 그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낭비라고 느껴지기도 해. 내가 왜 귀한 시간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지? 싶거든.

요즘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때가 택시를 탔을 때라는 말을 들었어.  택시 기사님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정치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잖아. 사실 엄마도 택시 타기 전에 기사님의 얼굴을 힐끗 보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타게 되더라고. 제발 아무 말 없이 목적지까지 가주셨으면 하고 바라면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그날은 정말이지 너무 힘든 날이었어.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가야 하는 퇴근길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지는 날이었지.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집에서 기다리는 너라는 존재가 없다면, 그 길로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든 날이었어. 강남역 사거리에서 택시를 잡아 탔지. 당시의 형편으로는 택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땅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몸과 마음으로 도착하느니 차라리 돈을 쓰고 심신의 안정을 얻자. 택시에서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고 집에 도착해서는 좀 밝아진 얼굴로 너를 만나자 하는 마음이었어.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기 마련인 건지, 아니면 기사님이 보기에 내 얼굴이 너무나 어두워 보여 무슨 이야기라도 해주지 않으면 며칠 있다가 죽을 사람처럼 보였는지, 난데없이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 처음엔 또 시작이네 싶어서 별 호응을 하지 않았는데 한 남자의 굴곡진, 그리고 기가 막히는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귀가 운전석 쪽을 향하고 있더라고.



20년 전 일이라 지금은 그 기사님의 이야기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말이 있어. 예순이 되고 인생의 시련도 어지간히 끝나고 이제야 좀 살만해졌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생각이 많아지는 때는 바로 퇴근 무렵과 출근하는 시간이라는 거야. 식탁에 혼자 앉아서 말라비틀어진 밥통의 밥 한 덩어리를 물에 말아먹으면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아가씨(그땐 엄마가 30대 초반이라서 그렇게 보였을 거야) 지금 얼굴이 딱 그래 보여서 하는 말이라고 했어. 택시에서 내리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 걸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지. 수고비를 넉넉히 챙겨드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지만 목구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는 바람에 목이 콱 잠겨 소리가 안 나올 것 같았거든.



고장 난 지하철 출입문을 고치던 아들을 하루아침에 하늘로 보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토바이 배달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음주 운전 차와 부딪쳐 세상과 이별한 남자가 있고 그 남자의 집에는 임신한 아내가 있고. 작별 인사 한 마디도 못하고 가족과 헤어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그런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읽으며 지나치게 발달된 통신망과 홍수처럼 쏟아지는 sns의 정보를 차단하고 싶어 지지. 이 세상은 마치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건과 사고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서 두려워져.


지야. 살다 보면 우연히 다른 사람의 기막힌 인생을 듣게 될 때가 있어. 상대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나도 모르게 등이 곧추세워지곤 해.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았구나. 내 시시한 일상이 어쩌면 행운이구나. 그러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인생과 내 인생을 비교하는 마음을 그 사람이 알게 될까 봐 괜히 미안해지지.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는 말, 참 권태로운 일상처럼 들리잖아, 무료한 하루하루. 그러나 권태와 무료가 아닌 무사함이라는 걸 그 택시 안에서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지야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말, 엄마라서 아끼는 말을 다른 곳에서 듣는 너라서 참 다행이야. 지은 네가 어떤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지 짐작은 못하지만 적어도 엄마보다는 나은 인간이 될 것 같아서 약간 안심이 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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