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ip Glass | Two Pages
종교, 예술, 철학이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는 일이라면, 이를 추구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라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붓다의 실상 역시 종교적 깨달음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혁명의 아우라 속에 놓고 읽어야겠지요.
-최진석, '건너가는 자'
무소유는 갖지 말라, 쌓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소유는 세계를 자기의 뜻에 맞게 해석하고,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태도입니다. 무소유는 소유적인 태도를 없애라는 말이니, 세계를 자기 뜻대로 정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193p
살려면, 경쟁 구도를 넘어서는 일대 도약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소위 '혁신'이라고 합니다. 일대 도약을 감행하는 중심 개념으로 도가에서는 도를 제시하고, <반야심경>에서는 공을 제시합니다.
-242p
저자가 <반야심경>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두 가지란 '바라밀다'와 '공'이다.
'바라밀다'는 '건너가기'를, '공'은 '본무자성(본래 스스로 지닌 성질이 없다)'을 뜻한다.
또한 이 두 가지는 서로 통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세상에 본질이라는 것은 없고 인연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비워져 있는 상태라면 어디로든 건너가지 못할까?
모든 게 '공'임을 안다면 생은 정착이 아닌 건너감의 연속, 혁신이 된다.
공은 속세로 건너갈 수 있으며
양자역학으로도 건너갈 수 있고,
주역으로도 건너갈 수 있으며,
도덕경으로도 건너갈 수 있다.
특히 반야심경의 본무자성, 주역의 일음일양, 도덕경의 유무상생
각 경전에서 불리고 있는 '도'는 다를지라도
그 뜻이 서로 통한다는 것에 신묘함을 느낀다.
하긴, 어디로든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라고 할 수 있겠냐마는.
붙잡을 수 없는 '도'를 떠올리면 언제나 즐겁고 신선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되는 것 역시 기묘하다.
손에 잡히지 않는, 낯설고 유동적인 것이라면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안정적이고 익숙한 것만이 좋다는 관념에 갇혀 '공'하지 못했기에,
도를 찾을 수 없었고
도의 차원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느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부단히 벗어나야 한다, 건너가야 한다.
세상의 온갖 말들에 갇히지 않도록.
천상천하 유아독존할 수 있는 내 안의 붓다가 깨어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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