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또라이
그와 커피 친구가 되어 한 달에 한두 번 카페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호칭 정리하는 건 어때요? 계속 사장님, OO씨 이러기에는 좀 그렇잖아요.”
“아... 그것도 그렇네요. 좋은 생각 있어요?”
“우리, 실명 말고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건 어때요? 예를 들면 스타벅스에서 그러는 것처럼 제니, 샘 이렇게요.”
“닉네임이요?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재미있을 것 같네요.”
“뭐가 좋을까요.”
“전 올리비아로 할래요. 줄여서 리아.”
“올리비아요?”
“네. 제가 좋아하는 여배우 중에 하나가 올리비아 핫세이기도 하고, 또 올리비아라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정말 맘에 들거든요.”
“올리비아 핫세는 알겠는데, 애니메이션 주인공은 누군지...”
“아, 모르실 수도 있어요. 저희 애가 어릴 때 보던 만화 주인공인데, 아주 귀엽고 생각하는 게 저와 비슷한 돼지예요.”
“돼지요?”
“네, 또라이지만 사랑스러운 돼지요. 하하하.”
“하하하. 그럼 전 어떤 걸 하는 게 좋을까요? 평소에 좋아하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음, 그럼 사장님이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려보세요. 색깔, 향, 물건, 영화, 음악 등등.”
“전 파란색을 좋아하고, 바다냄새를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고...”
“블루! 블루 어때요? 좋아하는 색도 파랑이고, 바다 색도 파랑이니.”
“오! 맘에 들어요. 그럼 전 이제 블루입니다.”
“블루, 이번 주는 어떻게 지냈어요?”
“이번에 새로운 직원을 뽑았는데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실수가 많아요. 그거 뒷수습하면서 지켜보는 중이에요. 일 잘하는 좋은 사람 어디 없나요?”
“그런 사람 있으면 이미 대기업에서 가져갔죠. 최저시급 받으며 일할 이유가 있나요?”
“아이구, 너무 정곡을 찌르시는데요. 리아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전 성실한지 먼저 보겠어요. 처음이면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성실함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에요. 타고난 성품이 근면성실이면 시간이 걸려도 쓸만한 인재로 만들어갈 수 있죠.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어요. 능력이 갖춰지고 성과를 낼수록 그에 맞는 대우도 해줘야 해요.”
“성과급을 말하는 건가요?”
“그게 성과급이든 수당이든, 능력에 맞게 돈이 따라가야죠. 돈은 없던 애사심도 만들어주니까요.”
“하하, 일리가 있어요. 혹시 리아는 나와 같이 일할 생각 없어요?”
“전혀요. 블루와 일하게 되면 우린 친구가 아닌 고용주와 고용인이 되는 거예요. 그럼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죠. 안전거리 유지, 이건 사람 간에도 필요해요.”
블루와 나는 잠시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저 마트 그만두려고요.”
“네? 무슨 일 있었나요?”
“음...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돈 주는 거에 비해 일을 너무 많이 시켜요.”
“아... 일이 너무 힘들었나 보군요.”
“아니요. 일이 힘들다기보다 마음이 부대끼는 거죠. 처음에는 할 일이 요만큼이었는데 점점 이것도, 저것도 넘어오는 거예요. 처음에는 잠깐 부탁하는 거다.. 이러다 실수 없이 해내니까 이젠 당연히 제 일이 되어 버린 거죠. 전 그쪽 입장을 배려해 주었는데 이젠 그걸 권리인 줄 알더라고요.”
“일을 잘하는 것도 문제네요. 하하하.”
“그런가요. 당분간 쉬면서 다른 새로운 일을 찾아보려고요.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으니까요.”
“근데 새로운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다시 지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요?”
날 보는 그의 눈빛에 걱정과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블루, 제 특기가 뭔지 아세요?”
“특기요? 뭐예요?”
“전요,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서 적응 하나는 끝내주게 잘해요.”
직업군인인 아빠를 둔 나에게 잦은 이사는 숙명이었다. 이사를 많이 다닌 만큼 잦은 전학도 필연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를 읊어보자면
연남국민학교, 고산국민학교, 원통국민학교(그 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
원통중학교, 금오여중, 삼천중학교, 광안여중
부산동여고, 충남여고
이렇게 다니다 보니 자연히 오랜 친구는 없다. 오래 알고 지낼 만큼의 추억도 쌓지 못했고, 지금처럼 핸드폰이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그나마 보석 같은 친구들과의 소식도 끊기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경우는 전학 간 날이 시험날인 경우다.
가뜩이나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과의 첫 시간인데 시험이라니. 그건 나에게도 전학생을 대하는 친구들에게도 결코 좋은 시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선생님이
“이번에 전학 온 OOO야. 공부도 잘하고 상도 많이 받는 친구니 모두 잘 지내도록.”
이 한마디는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과도 같았다. 성적과는 별개로 시험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있는데 내 등수를 뒤로 밀리게 할지도 모르는 전학생이라니. 난 그날 이후로 괘씸죄가 추가되어 한 달 동안 투명인간이 되어야 했다.
다양한 지역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신기하게도 공통된 규칙이 있다. 그건 바로 전학 간 1, 2주 동안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것을 왕따라 부르며 학교폭력으로 간주하지만 알다시피 국민학교 시절에는 학폭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렇게 1, 2주 정도 적응 시간이 지나면 제일 먼저 다가오는 건 반에서 공부 못하는 뒷자리 아이들이다. 물론 전학생은 뒷자리에 앉아서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지만 한 번쯤 왕따를 당해본 아이들이어서인지 측은지심으로 다가가와 말을 걸었다.
“이리 와. 우리랑 같이 밥 먹자.”
그 말이 얼마나 반가운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도시락을 들고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 밥을 먹을 때는 정말이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여기서의 투명인간은 끝이구나. 이제 이곳도 지낼만하겠다는 안도감은 그 어떤 반찬보다 맛있었다.
뒷자리 친구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공부에만 관심이 없을 뿐 다른 거에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성적이 전부였던 시절이라 뒷자리 친구들은 학교에서 노는 아이들로 찍혀 관심밖이었다. 그 친구들과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고, 외모 치장하는 법을 배우고, 만화책을 돌려보고, 연예인에 대해 토론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시험기간이 다가왔고 결과가 발표되었다. 담임선생님이 교탁에서 성적순으로 이름을 호명하는 건 그나마 인간적이었다. 성적에 대한 압박이 심한 학교는 반성적 및 전교등수를 벽보로 붙이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성적이 공개되면 뒷자리 친구들이 어김없이 하는 말이 있다.
“OO야, 너 진짜 공부 잘하네. 근데 왜 우리랑 놀아?”
지금도 나는 마음이 힘든 일이 있거나 몸이 지칠 땐 전학 간 날이 시험날인 꿈을 꾼다. 그리고 나에게 먼저 손 내밀어준 정 많은 뒷자리 친구들이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