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또라이
점심시간, 직장 동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태몽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울 어머니가 밭에서 커다란 고구마를 캐는 꿈을 꾸셨대. 얼마나 큰지 처음에는 큰 바위인 줄 알았다는 거야. 자세히 보니 고구마 더래.”
“내 태몽은 딸기인데. 할머니가 시장에 가서 한 바구니 가득 빨간 딸기를 사는 꿈을 꾸셨다고 해서 내가 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낳아보니 아들인 거죠. 우리 집에 딸이 귀한데 딸이라고 기대했다가 시뻘건 아들이 태어나서 다들 실망했대요.”
“OO 씨는 무슨 태몽이에요?”
“저요? 전 태몽 없는데. 부모님이 먹고살기 바쁘셔서 저희 자매 모두 태몽은 못 꾸셨대요.”
“저도요. 동생은 호랑이 태몽 꾸셨다는데 전 태몽 없이 생겼대요.”
어릴 때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태몽에 대해 말이 나오면 난 괜스레 할 말이 없었다. 태몽 없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근본이 하찮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를 가지려고 했을 때 내 아이의 태몽만큼은 내가 꾸고 싶었는데 그 또한 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내가 태몽에 대해 투덜거릴 때면 우리 박여사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다.
“그래도 넌 잉어 먹고 태어났어.”
난 우리 자매 중 유일하게 태어나기 전까지 아빠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그 시절 태아에게 좋다는 잉어까지 먹고 태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언니를 낳고 4년 만에 어렵게 가진 아기였기 때문이다.
첫 아이가 예쁘긴 해도 딸이었던지라 아빠는 실망하셨다. 그 시절은 뭐니 뭐니 해도 집안에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하던 때였다. 그런데 첫 아이가 딸, 두 번째는 막달에 사산되었다. 박여사가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다 큰 트럭의 경적 소리에 놀라 넘어져 다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박여사와 이사장님은 사산된 아기가 아들이라는 사실에 더 실망하셨다. 그 귀한 아들이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사라지다니.(그 이후로 우리 자매에게는 자전거 금지령이 내려졌고 난 아빠 몰래 자전거를 배웠다) 엄마는 내가 생기기 전까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건강한 아기 하나만 달라고 신께 기도하고 또 빌었다고 한다.
그러다 내가 생기자 이사장님은 당연히 아들일 거라 생각했고 이번에는 건강하게 태어나라고 엄마에게 큰 잉어까지 바치셨다. 하지만 태어난 아기는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 그것도 첫째와 달리 못생긴 딸.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셨는지 아빠는 한동안 날 안아보지도 않으셨다.
“아니, OO은 한번 안아보지도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어렵게 생긴 아이인데 들여다보기는 해야지.”
“뭘... 유난스럽게. 건강하게 잘 태어났으면 되었지. 흠.”
“딸이라고 쳐다도 안 보고, 내가 이럴라고 힘들게 나은 줄 아나. 아이고.”
어릴 때의 결핍은 늘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도 같다. 그래서 난 내 아이만큼은 결핍 없이 자존감 높은 아이로 자라길 바랐다. 그래서 늘 아이에게 태몽 이야기를 실감 나게 들려주며 마무리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러줬다.
“엄마, 내 태몽은 뭐예요?”
“우리 OO은 외할머니가 돼지꿈을 꾸셨대. 거실 소파에 앉아계시는데 아기 동물들이 집에 들어와서 난장판을 만든 거지. 병아리, 오리, 돼지, 강아지, 고양이, 토끼, 염소 등등...... 그래서 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다 쫓아냈는데 아기 돼지만 안 나가고 소파 밑에 자리 잡고 누워있더라는 거야. 꿈이 너무 생생해서 엄마한테 물어보시더라고 ‘너 혹시 아기 생겼냐’고. 그때가 딱 임신한 걸 알았을 때쯤이었어. 게다가 네가 돼지띠이기도 하니 신기하지?”
그래서일까 내 아이는 자존감이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너무 많이 불러주었는지 사랑을 받기만 할 뿐 나눠주는 방법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엄마, 엄마는 MBTI가 뭐예요?”
“왜?”
“궁금해서요. 엄마는 왠지 평범하지 않을 것 같아요.”
“다양한 인류를 겨우 16가지로 분류한 걸 믿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아이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지만 나도 궁금해졌다. 정확하진 않아도 내가 어느 무리에 속하는지 아는 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검사 결과는 역시나 평범하진 않았다.
ENTJ. 지금까지 내가 알고 지낸 사람 중에서 나와 같은 MBTI를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엄마, 엄마 MBTI 특징 알려줄게요. 들어봐요. 도전적이고 진취적, 약한 티 안 냄, 생활력 강함, 감성팔이 싫어함, 변화를 좋아함, 솔직함, 내숭 제로, 남한테 의존 안 함, 인내심 부족, 성격 급함, 카리스마 장착, 한 마디로 센 언니. 와.... 소름... 완전 엄마네요.”
“내가 센 언니야? 아니야, 나처럼 심성 고운 여인이 어디 있다고.”
“웩~ 그건 아니다. 엄마는 마음은 착한데 표현이 강하잖아요. 난 엄마가 ‘저기요’로 시작하면 불안하더라. ‘저기요’ 하면서 할 말 다 하잖아요. 화내는 것보다 원래 그런 성격이 더 무서워요.”
“그래? 뭐 그렇다 치고, 우리 OO은 MBTI가 뭐니? 엄마랑 같니?”
“아니요, 나랑 엄마는 완전 반대예요. 아빠랑은 같은데.”
“원래 같은 성향끼리 있으면 모 아니면 도야. 잘 맞을 땐 다행인데 안 좋을 땐 완전 전쟁이라니까. OO랑 엄마처럼 아예 서로 다르면 그런가 보다 하면서 맞추며 지내면 되지.”
“그런가....”
“의심하지 말거라. 엄마말을 믿으세요.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웩~”
아이가 알려준 MBTI를 떠올리며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명 정신과 의사들이 유O브에서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유형과 어려운 유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게 되었다.
“ENTJ는 우울증에 걸리기 가장 어려운 유형이에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상 스트레스를 스트레스로 생각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기회로 여기죠. 또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아요.”
맙소사, 내 MBTI는 우울증에 걸리기 어려운 유형이란다. 그런데 난 우울과 불안으로 일 년 넘게 치료를 받았다. 평범하지 않던 내 삶이 평범하지 않은 내 MBTI를 이긴 것이다.
무난하게, 무던하게 살고 싶은 내 평범한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