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또라이
나는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래서 늘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상대방을 기다린다. 근데 이번에는 선수를 빼앗긴 듯하다. 그는 나보다 더 일찍 와서 입구에서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다.
“어머, 저보다 일찍 오셨네요.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계셔도 되는데 왜 밖에 계세요?”
“아.. 그게 여기는 처음이라... 여기서 기다리는 것도 괜찮아요.”
“여기가 처음이라구요? 세상에. 여기를 안 와보시다니, 사장님은 강릉 분 맞아요?”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평소에는 바쁘다 보니 여유 있게 커피 한 잔 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하하.”
“우리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저녁도 못 드신 듯한데 여기, 빵도 맛있어요.”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바다와 해송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여기 맘에 드세요?”
“네, 바다도 나무도, 카페도 너무 아름답네요.”
“그쵸? 전 여기가 참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게 다 있거든요. 바다, 나무, 노란 조명, 커피... 이 모든 게 조화로운 곳은 흔치 않아요. 그래서 경기도에 살 때 여기서 커피 한잔 마시기 위해 당일로 온 적도 있어요.”
“네? 당일치기요?”
“네. 우리나라는 당일 생활권 아닌가요? 하하하”
“아이구, 전 하루종일 운전하는 건 힘들어서... 운전을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한다기보다 즐기는 편이죠. 멍하니 운전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 새로운 곳에 갈 수도 있고, 재미있잖아요.”
그가 말하고 있는 날 유심히 바라본다.
“전부터 느낀 건데 말을 참 잘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요?”
“네, 뭐랄까. 어려움 없이 술술 말한다고나 할까.”
“그런가요? 사실 이건 오랜 훈련의 결과예요. 사장님이니 특별히 알려드릴게요.”
8살 때 난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학교에 입학하고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 입학 스트레스 때문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 가족은 내가 그때 말을 더듬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장장 일 년간 계속되었는데도 말이다.
“어, 어, 엄마, 마,, 말이 잘 안 나와요. ㅇ..어....어어어떡해요.”
“응, 그래. 언니랑 동생한테 밥 먹으라고 해”
"ㅇ...어...어언니, 이...이이이상하게 말이 잘 안 나와."
"그럴 때도 있어. 좋아지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가족의 반응에 난 슬펐다. 어릴 때부터 뭐든 빨랐던 나에게 이런 시련은 당황스럽다 못해 황당했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무관심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는 버릇이 있기에 난 또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만의 동굴에 들어가 원인과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나의 급한 성격이 말을 더듬게 한 원인이라는 것을.
입학과 동시에 내무반에서 벗어나 내 또래 아이들과 함께 있기 시작한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만큼 말도 많았다.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생각들과 급한 나의 성격은 혀를 꼬이게 했고 말을 더듬는 결과로 나왔다. 그래서 생각을 천천히 말로 표현하는 연습을 수없이 했다.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한 글자씩 말하고 또 말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나자 다시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스스로 해결하다니 놀라운데요. 근데 어떻게 가족들은 그걸 모를 수가 있죠?”
“모두에게 전 말 잘하는 아이였으니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보고 싶은데로 보고, 듣고 싶은데로 들으려고 하죠. 그걸 바꾸려고는 하지 않아요. 근데 제 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사장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한참을 머뭇거리다 그가 말했다.
“제가 사실은,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다 보니 친구가 없어요. 물론 일로 만난 사람들은 많지만. 저와 친구가 되는 건 어때요?”
“어떤 친구 사이를 말하시는 건지.”
“음... 그러니까 가끔 만나서 사는 이야기, 사람 이야기를 나누는 소박한... 친구요. 아까도 말했지만 속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없거든요.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기도 했는데 영...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친구라..."
그의 눈을 잠시 바라봤다.
난 눈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누군가 그랬던가.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난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한다. 눈은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눈빛까지 숨기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얼른 피하는 게 좋다.
그의 눈빛은 악의가 없다. 내게 뭔가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다. 정말 순수하게 이야기할 사람을 찾는 것 같다. 경기도에서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모든 인간관계를 정리한 나에게 이전의 삶과 엮이지 않은 친구하나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좋아요. 그럼 테마가 있는 건 어때요? 우리가 일로 만나긴 했어도 같이 일하려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니.. 뭐가 좋을까요? 음.... 이건 어때요? 사장님도 커피를 좋아하시니 커피 맛집을 찾아다니는 친구.”
“오... 좋은데요. 그럼 우리 커피 친구 하는 거예요.”
“네. 반가워요. 커피 친구. 단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밀 유지하셔야 해요. 제가 마트 사람들 뒷담화를 할 수도 있으니.”
“그럼요. 당연하죠. 저에 대한 것도 비밀유지 하셔야 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