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또라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거래처 사장님이 검은 봉지 가득 뭔가를 안고 들어오신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이게 다 뭐예요?”
“이거, 장사하면서 생긴 건데 은행 가기 귀찮아서 이리 가져왔어. 이걸로 이번 달 거 정산하고 부족한 금액만 알려줘. 장보고 있을게”
봉지 가득 담긴 다양한 동전들이 날 보고 깍꿍 한다. 족히 몇 백 개는 되어 보이는 이걸로 이번 달 거래금을 정산하라니 정말 융통성이 대단하다.
“사장님, 저희는 은행이 아니라 동전분류 기계가 없어요. 하나하나 다 세서 하려면 며칠은 걸리겠는데요. 오늘은 장보고 바로 가셔야겠어요. 제가 다 되면 연락드릴게요.”
“그래? 뭐 그렇게 오래 걸려? 금방 할 것 같은데.”
“아, 그러면 사장님이 직접 하시겠어요? 전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긴 바빠서 가야 한단다.
사장님을 보내고 동전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이 동전 속에서 헤엄쳐야 할 것 같다. 거래 은행에 가서 부탁하면 되지만 월말인 지금은 민폐가 된다. 책상 위에 일회용 식탁보를 깔고 한 주먹씩 꺼내서 분류를 시작한다. 생각보다 동전에서 먼지와 지저분한 것들이 많이 떨어진다. 분류를 끝내고 나면 하얀 식탁보는 금세 군데군데 얼룩이 져있다.
우리나라 동전뿐 아니라 동남아 동전, 일본 동전까지 다양한 동전들이 책상 위에 펼쳐진다. 다양한 나라 동전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쌓여가는 양이 점점 많아진다.
“안녕하세요. 뭐 하고 계세요?”
다른 거래처 사장님이다. 이분이라면 왠지 날 도와주실 것 같다.
“사장님, 혹시 시간 있으세요?”
“저요? 지금?”
“네. 지금이요. 뭘 그렇게 긴장하세요. 제가 커피라도 사라고 할까 봐요?”
웃으면서 대답하자 사장님의 동그랗게 뜬 눈에 웃음이 핀다.
“아, 아뇨. 긴장 안 했어요. 커피, 사라면 사야죠.”
“아니에요. 커피 말고 시간 있으시면 이것 좀 도와주세요.”
“아, 네. 그러죠. 커피도 사드릴 수 있는데......”
드릴 듯 말 듯 말하는 소리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사장님, 이거 끝나면 제가 커피 살게요.”
“진짜요? 약속하신 거예요.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는다. 그리곤 제법 빠른 속도로 동전을 분류하기 시작한다.
“와~ 일을 잘하시네요. 괜히 사장님이 되신 게 아닌가 봐요.”
“아. 그런가요?”
내 칭찬에 긁적긁적 뒷머리를 만지며 멋쩍어한다.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다.
일이 어느 정도 속도가 붙자 그가 묻는다.
“혹시 저 본 적 없으세요?”
“언제요?”
“아, 아니에요. 그냥 혹시나 하고 물어봤어요.”
“사장님을 처음 정동진 근처 카페에서 보긴 했죠.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지만.”
“네? 그걸 기억하세요?”
“그럼요. 그때 카페에 손님이라고는 사장님과 저, 둘밖에 없었잖아요. 제가 쓸데없이 관찰력이 좋아요. 하하하.”
“절 기억하신다니 놀랐는걸요.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어어~그런 발언 좀 위험한데. 사장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결혼하셨어요?”
“위험하다뇨.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싱글이에요. 아직 좋은 사람을 못 만났지만.”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진 그의 모습이 처음 봤을 때와 사뭇 다르다. 그때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감정이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살짝 웃고 있는 그는 사춘기 소년같이 수줍다.
“사장님 덕분에 일이 빨리 끝났네요. 무슨 커피 좋아하세요? 제가 매장 가서 사 올게요.”
“저기, 밖에서 먹는 게 아니고요? 저 이래 봬도 고급인력입니다.”
“아이구,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한껏 과장된 표정으로 이야기하며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그와 한 뼘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제가 너무 헐값에 커피를 사려고 했나 봐요. 사장님 좋아하는 카페 있으세요?”
“전 어디든 괜찮아요.”
“그럼,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서 보는 건 어때요? 거긴 커피도 맛있지만 풍경도 정말 좋아요.”
“좋죠. 언제 볼까요?”
“빚은 빨리 갚아야 맘이 편해요. 오늘 저녁 어떠세요?”
그녀와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카페에서 날 봤다니 나만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녀도 날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편하다. 그녀에게는 왠지 모르게 끌려가는 듯하면서도 배려받는 느낌이 있다. 정말 묘한 사람이다. 하지만 무장해제 되는 이 느낌이 싫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