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5. 이열치열 말고 살얼음 동동 떠있는 묵사발 한 그릇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위로가 되는 순간도 없습니다.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서 온전한 끼니조차 챙길 수 없는 당신에게. 매주 금요일 소소한 한 끼를 들려드릴게요.
인생, 음식. 소소한 이야기 한 그릇.
길고 길었던 장마를 보내며 이제는 꿉꿉하고 눅눅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비가 내리지 않는 반가운 하늘과 함께 찾아온 이 폭염은 단 며칠 만에 사람을 지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처럼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분들이라면 폭염과 열대야가 시작된 요즘이 정말 무서우실 것 같은데요, 오늘의 인생음식은 땀 흘리고 지치는 요즘에 잘 어울리는 음식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이열치열.’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아주 익숙한 한자성어인데요, 더위에 취약한 저는 이 말을 정말 싫어해요. 땡볕에 얼굴은 금방 빨개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이렇게 한 계절을 보내면 새카매지는 팔다리와 얼굴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열치열이라뇨. 저는 더위와 맞붙고 싶지 않아요. 제가 질 게 뻔하기 때문에 정면승부를 하는 대신 그저 살얼음 동동 떠 있는 묵사발 한 그릇을 하며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싶습니다.
주말의 늦은 밤. 엄마의 최애 프로그램 중 하나인 ‘알토란’을 함께 보고 있었는데, 그 날은 ‘불을 사용하지 않고 도토리 묵사발을 만드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전자레인지를 이용해 단 7분 만에 묵을 쑬 수 있다는데, 엄마나 저는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TV에 나오는 과정들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엄마는 도토리를 직접 말리고, 앙금을 내리고, 방앗간에서 가루를 만들고. 그 가루를 잘 보관해 심심치 않게 집에서 도토리 묵을 직접 만드시는 분이거든요. 덕분에 저는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작은 도토리를 망치로 내리치고 까면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호두 까는 다람쥐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 도토리 가루를 얻게 된다 해도 적어도 3, 40분 동안 끓이며 저어주고, 뜸 들이는 과정들 때문에 자연스레 ‘보통일은 아닌 것’이 되어 버렸고요. 그런데 가스레인지도 없이 그것도 7분 만에 묵을 쑬 수 있다니.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알토란'의 레시피를 참고했습니다.
-재료: 도토리가루, 물, 꽃소금, 참기름, 멸치액젓, 국간장, 설탕, 후춧가루, 신김치, 김가루, 청양고추, 깨, 식초
1. 도토리가루와 물을 각각 1컵씩 넣고 거품기로 잘 섞는다.
2. 잘 섞어준 반죽에 물 2컵을 더 넣고 다시 섞은 후 체에 거른다.
3. 잘 섞인 반죽에 꽃소금 1 작은 숟가락, 참기름 1 큰 숟가락을 넣는다.
4. 랩을 씌운 후 전자레인지에 5분간 돌려준 후, 반죽을 다시 한번 저어주고(이때, 한 방향으로만 저어줘야 함) 2분 더 돌려준다.
5. 조리된 반죽이 굳기 전에 밀폐용기에 옮겨 담고 랩을 씌운 후 구멍을 뚫어 냉장고에서 1시간 동안 식힌다.
6. 멸치액젓 2, 국간장 1, 설탕 2 큰술, 후추 한 꼬집을 넣고 설탕이 다 녹을 때까지 저어준다. 그 후 물 3컵을 넣어 냉동실에 넣어둔다. (지퍼백에 담아 얼리면 살얼음 육수를 사용하기 편하다.)
7. 식힌 묵을 적당한 크기로 썰고 그릇에 담은 뒤 얼려 둔 육수를 붓는다.
8. 신김치, 김가루, 청양고추 1개를 위에 올리고, 식초 2큰술, 깨를 뿌린다.
더위에 지쳐 입맛도 없는 요즘. 이럴 땐 정말 가스레인지를 켜는 것조차 무서울 때가 많아요.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잘 챙겨 먹어야 하잖아요. 오늘은 불 없이 전자레인지로 만들 수 있는 도토리 묵으로 시원한 여름 별미인 묵사발 한 그릇 하며 열대야를 이겨내 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 저녁, 시원한 묵사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