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7. 시원한 어묵 물회 한 그릇으로 전하는 소소한 위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위로가 되는 순간도 없습니다.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서 온전한 끼니조차 챙길 수 없는 당신에게. 매주 금요일 소소한 한 끼를 들려드릴게요.
인생, 음식. 소소한 이야기 한 그릇.
오늘의 인생 음식에는 여름휴가와 관련된 사연이 도착했습니다. 어떤 사연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할게요.
꿈에 그리던 여름휴가였어요.
남들 다 쉬는 휴가철마다 업무 특성상 늘 일이 많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여름은 남들이 다 쉬는 휴가기간에 여행을 갈 수 있게 된 거죠.
저는 평소에 물을 좀 무서워해서 바다가 아닌 계곡으로 휴가를 가기로 했어요. 모처럼만의 휴가로 마음은 설레고 가슴도 콩닥콩닥 뛰고…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 하도 오랫동안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보니 여름휴가 때 신을 만한 슬리퍼가 없더라고요. 신발장을 열어보니 평소 집 앞에 외출할 때 신는 3선 슬러퍼가 떡 하니 보이긴 했지만 저걸 신고 여행 가는 건 정말 좀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백화점에 갔어요. 지금껏 슬리퍼에 만 원 이상의 돈을 투자해본 적도 없는 저에겐 모든 예쁜 슬리퍼들이 다 그림에 떡이었죠. 그러던 중 F매장에서 제 눈길을 사로잡는 아주 예쁜 슬리퍼가 보이더라고요. ‘우와. 저걸 신으면 정말 간지가 나겠다.’ 자석에 이끌리듯 매장에 들어간 저는 점원에게 가격을 물어봤습니다.
“5만 3천 원입니다.” 5만 3천 원. 단 돈 만원도 투자해본 적이 없는 슬리퍼에 5배가 넘는 금액을 쓴다?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사고는 싶은데 이건 너무 비싼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백화점을 몇 바퀴 돌며 고민하다가 ‘그래. 모처럼의 휴가인데, 간지 좀 내고 가자.’라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슬리퍼를 구매했습니다.
여행 당일, 간지 나는 슬리퍼는 고이고이 싸서 배낭에 넣고 푸르름이 반겨주는 계곡으로 향했습니다. 숙소에 도착하고 짐을 풀고 드디어 친구들과 계곡으로 물놀이를 하러 갔어요. 당연히 간지가 좔좔 흐르는 새 슬리퍼를 신고 말이죠.
‘휴가란 이거구나. 역시 계곡이 짱이다.’라고 생각하며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발끝에서부터 전해오는 시원함과 짜릿함을 느낄 때쯤 갑자기 친구 녀석이 물장난을 치는 거예요.
‘아니. 감히 이 녀석이 나의 힐링을 방해하다니.’
그때부터 남자 넷의 신나는 물장난이 시작됐습니다. 저 역시 승부욕이 강한 편이라 질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고 정말 오랜만의 물놀이라 정신없이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바로 그때. 계곡 저편으로 하얀 무언가가 둥둥 떠서 흘러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쪽 발바닥이 쎄-한게 느껴졌습니다.
네. 맞아요. 두 눈을 질끈 감고 난생처음 장만한 간지 좔좔 흐르는 저의 F슬리퍼가 계곡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어요. 온 힘을 다해 깽깽이로 쫓아가 봤지만 계곡물이 갑자기 확 깊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 따라갈 수가 없게 됐고, 손 까지 뻗어봤지만 그 아이는 영영 계곡 저편으로 흘러갔습니다.
물장난을 멈추고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 물으며 다가와서 슬리퍼가 떠내려갔다고 하니 숙소에 남는 삼선 슬리퍼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얘들아 걱정을 하는 게 아니야. 마음이 아픈 거고 속이 쓰린 거지. 그리고 삼선? 그거보다 5배 비싼 슬리퍼거든. 그리고 아직 30분도 못 신었거든.’
다음날 숙소를 나와 집에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계곡물이 흐르는 곳을 눈이 떨어져라 보고 있었어요. 네. 제 간지 나는 F슬리퍼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 후 지금 여자 친구가 슬리퍼를 사주기 전까지 저는 단 한 번도 슬리퍼를 산 적이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휴가에서 큰 마음먹고 산 슬리퍼를 30분 만에 잃어버리다니. 사연에서 그 허탈함과 속상함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희고 예쁜 그 슬리퍼는 떠났지만, 다음 휴가에서는 여자 친구분께서 사주신 새 슬리퍼와 함께 더 좋은 추억 만드시길 바랄게요. 그리고 오늘, 인생 음식이 그 속상함을 달래드릴 수 있을만한 음식을 만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재료: 양배추, 당근, 오이, 깻잎, 양파, 사각어묵, 냉면육수, 초고추장, 고춧가루, 마늘, 참기름, 통깨.
1. 양배추, 당근, 깻잎, 오이는 채를 썰어둔다.
2. 사각어묵을 둥글게 말아 면처럼 길게 채를 썰어주고, 뜨거운 물에 헹군 후 찬물에 식힌다.
3. 냉면육수(2팩)에 고추장 3, 고춧가루 1, 설탕 1, 다진 마늘 1, 참기름 1, 통깨1 을 넣고 섞어 물회 육수를 만든다.
4. 그릇에 썰어둔 채소와 어묵을 담고 물회 육수를 붓는다.
어떤 음식을 만들어드릴까 많이 고민해봤는데, 우연히 SNS에서 본 어묵 물회가 생각났어요. 회 대신 어묵을 넣어 먹는 건데, 식감은 회의 그것과는 좀 다르지만 재료 준비부터 만드는 방법까지 아주 간편합니다. 고소한 어묵이 시원하고 새콤한 육수와 만나면 잠시나마 이 여름의 열기를 잊을 수 있거든요. 슬리퍼를 떠나보낸 아픔이 있는 우리 사연자 분이나, 요즘 시국 때문에 휴가를 계획할 수 없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한 그릇입니다.
오늘 저녁, 상큼하고 시원한 어묵 물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