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일 한라산가서 주먹밥을 먹자며 장을 보자고 했다. 나는 그냥 올라가기 전에 보말칼국수나 보말죽을 간단히 먹거나 내려와서 식당가서 먹자고 했지만 엄마는 산에서 먹는 주먹밥 맛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냐며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근처 하나로마트에 가서 쌀, 참치, 마요네즈, 김가루, 참기름, 소금, 비닐장갑을 샀다. 왜 여행지에서 참기름과 마요네즈를 사면서까지 주먹밥을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쌀을 사서 밥을 하고, 참치를 넣고, 김가루를 묻혀야 하는데.. 과정을 생각하니 번거롭게 느껴졌다. 오늘 많이 걸어서인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골아떨어졌다.
나는 7시쯤 겨우 눈을 떴는데 엄마는 거꾸로 서있었다. 물구나무자세라고 하나? 요가를 좋아하는 엄마는 아침부터 요가를 하고 있고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30분 뒤 아빠가 숙소로 들어왔는데 산책을 다녀왔다고 했다.
'진짜 부지런하다. 게으른 나는 누구를 닮은 것일까.' 입밖으로 내뱉으면 게으른 내가 못나보일거 같아 속으로만 생각했다. 엄마는 밥을 짓고 비닐장갑을 끼고 양손으로 밥을 조물조물거리며 만들기 시작했다. 어제 참기름과 소금까지 산 엄마는 "깨가 있었으면 더 맛이 있었을텐데." 라고 말하며 아쉬워했다. 나는 속으로 '엄마는 너무 완벽주의야.'라고 생각하며 세수를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엄마는 주먹밥 먹고 출발하자며 식탁에 둘러앉아 주먹밥을 먹었다. '오, 맛있는데?' 엄마의 주먹밥은 기대이상이었다. 엄마는 요리를 잘한다. 엄마의 음식철학은 '인공조미료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때는 유기농 열풍이 일기 전이었다. 지금이야 대형마트에 유기농코너가 따로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유기농제품들이 크게 인기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동네에서 유기농식품을 파는 곳을 찾아 이용했다. 나와 동생의 주된 심부름은 유기농식품점에 가서 음식 재료들을 사오는 것이었다. 어렸을때는 엄마가 '몸에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며 먹거리를 통제하는 것이 싫었다. 친구들 집에 가면 맛있는 시리얼에 과자, 탄산음료가 있는데 우리집에는 두부과자, 쌀라면, 유기농우유가 있었다. 난 우유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우유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말 유기농우유는 특유의 향이 있다. 그래서 친구들이 우리집에 오면 줄만한 간식이 없었다. 한번은 햄버거가 먹고 싶어서 몰래 사와서 먹고 종이봉지를 책장에 껴놓았다가 엄마에게 발각된 적이 있었다. 어찌나 민망하던지. 그정도로 먹는것에 엄격했다. 몇년전 엄마가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사와서 "엄마가 햄버거를 사오다니.."라며 놀랬던 적이 있다. 지금은 예전만큼 유기농에 엄격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집에가면 천연조미료 뿐이다. 건강한 음식을 먹어서인지 나와 내동생들은 심하게 아파본 기억이 없다. 잔병치레 없이 셋다 건강하게 자랐다. 생각해보면 흔한 감기도 잘 안걸리는 것은 어린시절 엄마의 유기농 철학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은 감사하기만 하다.
엄마 덕분에 윗세오름에서 꿀맛같은 주먹밥을 맛보는 행운을 얻었다. 동그랬던 주먹밥 모양이 좀 흐트러졌지만 한라산을 오르는 동안 맛에 깊이가 있어졌다. 눈밭에 쪼그려 앉아 늦은 겨울바람을 맞으며 주먹밥과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라면과 함께 최고의 식사를 했다. 여행을 왔으니 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있었다. 음식의 종류보다 그 음식에 담겨있는 정성과 맛, 의미가 중요한 것인데. 고마워, 엄마. 내게 잊지못할 점심을 먹게해줘서. 몇년 아니, 몇십년이 흘러도 오늘의 주먹밥이 생생하게 기억날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