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라산을 처음 간 것은 5년전이다. 5년전 눈 내린 백록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제주에 가면 멀리서 한라산을 바라봤었는데 직접 가본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영실코스로 윗세오름을 가보기로 했다. '한라산은 겨울이 멋있다'는 말처럼 눈이 내린 한라산의 풍경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산을 오르기 전, 50대인 부모님의 체력을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나를 걱정해야했다. 엄마,아빠는 아침마다 배드민턴을 치는데 두분이서 같은 취미를 공유하게 된지는 1년정도 밖에 안됐지만 체력이 정말 좋다는 것이 느껴졌다. 적어도 나보다는 좋다는 것이 확실했다. TV에 나오는 유명한 헬스트레이너들이 어떤 운동이든지 꾸준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정말 꾸준함이 중요한거 같다. 나처럼 헬스 3개월 좀 하다가 쉬고, 요가 3개월 하다가 쉬고 이렇게 하면 운동하는 동안에는 반짝 체력이 좋아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게 된다. 엄마가 가장 빠르고, 그 뒤에 아빠, 그다음 나였다. 아빠도 걸음걸이가 느린편이라 산을 오르는 중간중간 "여보, 같이가!"라고 외쳤다. 엄마는 예전부터 걸음이 빨랐다. 아빠는 걸음이 느렸다. 이렇게 다른 성향의 사람이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부부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똑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도, 똑같은 성향의 사람도, 똑같은 성격의 사람도, 똑같은 경험을 하며 자란 사람은 없으니까. 내가 결혼을 하고 보니 지난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함께 살아왔다는 것이 존경스럽다.
영실코스는 계단이 많고 가파르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계단이 계속 나온다. 힘들다고 느낄때쯤 옆을 보면 멋진 절벽이 보인다. 조금 더 가까이에 보고 싶은 마음에 힘들어도 한계단 한계단 오르게 된다. 힘들게 올라야만, 숨이 차야만 볼 수 있는 절벽 앞에서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올라가면서 한번씩 흘끔흘끔 뒤돌아보면 위에서 내려다볼때만 보여지는 자연의 웅장함 앞에서 겸손해지고 힘든 것을 잊고 다시 나아가게 된다. 오히려 내려갈때 자연스레 보이는 풍경에 심취해있을거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올라갈때 한번씩 뒤돌아보는 풍경이 더 아름답다. '올라갈 수 있을까'에서 '올라갈 수 있겠다'로 바뀌는 순간 자신감이 솟아난다.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올때부터 좋은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제임스 후퍼'의 말이 생각났다. '내일 당장 에베레스트를 오르겠다고 다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실내등반과 같은 작은 실천을 통해 조금씩 오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고 나면 어느순간 여러분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입구에서 정상을 생각하면 너무 멀게 느껴지고 못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계단 하나를 생각하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올라가다보면 정상이 나온다. 제임스 후퍼가 나온 다큐멘터리, 후퍼가 쓴 책도 읽었는데 그의 말에서 삶에 대한 철학이 느껴지고 그 모습들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지금도 내 책장에는 제임스 후퍼가 쓴 '원 마일 클로저'라는 책이 꽂혀있다.
계단을 다 오르면 여기서부터는 백록담이 있는 곳이 보인다. 성판악 코스로 올라가면 저 위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도 참 멋지다. 몇일 전에 눈이 내렸다고 했는데 다 녹았을거 같은 눈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마치 히말라야에 온 것 같아." 엄마가 말했다. 아이같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엄마가 제작년에 2월쯤에 히말라야 가보고 싶다고 같이 가면 좋겠다고 내게 말했었다. 코로나 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이유들 때문에 히말라야는 못갔지만 히말라야 같은 곳에 왔다. 하고싶은 것, 꿈꾸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만큼은 못이룰지라도 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생각한대로 살게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소망을 말해본다. 우리 가족 모두가 앞으로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질거라고.
엄마, 아빠 뒤에서 따라가며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바닥에 눈만큼 하얀 흰머리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드신걸까.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흐른걸까.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는데 왜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을까. 받아도 받아도 더 받고 싶은게 자식의 마음인걸까. 나도 자식을 낳으면 내 자식도 이런 마음일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모님의 뒷모습을 따라 걸으며 죄송한 마음, 감사한 마음이 뒤엉켰다.
제주여행 중에 어떤게 가장 좋았냐고 물으니 엄마,아빠 둘 다 망설임 없이 '한라산'이라고 답했다. 사실 나도 그래. 눈 내린 한라산은 걱정없는 곳이다. 깨끗하고 순박한 느낌을 준다. 눈길을 따라 걸으면서 펼쳐지는 광경에 머릿속을 메우던 생각들은 사라지고 그 곳에 있는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엄마,아빠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10년뒤에도, 20년 뒤에도, 30년 뒤에도 같이 한라산 오게. 엄마,아빠와 함께온 한라산은 무척 행복했다. 한라산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내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