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워스
20
여자의 일생을 단 하루를 통해 보여준다
단 하루
바로 그 하루에
그녀의 일생이 담겨있다
/ 영화 [디 아워스] _ 버지니아
비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비에 씻겨 흘러가는 꽃잎처럼 나도 곧 흐르겠다.
그래도 아직 봄이다. 나는 아들에게 봄에 가고 싶다 했다. 봄에. 날씨는 화창했음 좋겠다 했고 개나리가 가득 핀 골짜기를 지나 저 먼 산자락에 뿌려지고 싶다 했다. 기억할까. 기억할 테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아들이다. 기억력이 좋던 아들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랑과 증오를 기록했다. 그토록 진득한 글들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 가끔은 너무나 잔인해서 나의 아들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런 아들을 느낄 때면 전복죽을 끓였다. 딱딱하고 차갑게 식어가는 아들의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끓이고 또 끓였다. 아들은 맛있게 먹었다. 나는 그런 아들을 품었다.
다리가 퉁퉁 부어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는다. 오늘이 고비일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닐 테다. 창밖에 만개한 저 꽃들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다. 배변 주머니를 찬 내가 꽃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날 아들에게 말했다. 차라리 보내지. 이렇게까지 붙들고 있어야겠냐고. 아들이 미웠다.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든 예뻐야 한다던 아들이 나를 이렇게 망가뜨린 것 같아서. 그래도 난 아들을 사랑한다. 숨이 멀어져 가는 이 순간에도 나는 아들이 보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 목덜미 주변으로 시큰한 땀 냄새가 나고 옆구리에서는 역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마지막으로 아들을 안고 싶다. 타오를 정도로 뜨겁게 안고 싶다. 내가 없으면 아들은 차갑고 차갑게 식어 갈 테니 온 힘을 다해 전해야 한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쉬어진다. 후 하고 내뱉으면 들이 마실 새도 없이 다시 후 하고 내뱉게 된다. 후후.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정신은 점점 몽롱해진다. 영애가 분명 훈이가 오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티라 했다. 내 동생 영애. 나 아프고부터 나를 돌보던 내 동생 영애. 사그라드는 눈동자에 영애를 가장 먼저 담았다. 그 뒤에 나약하게 서있는 당신. 내 일생 가장 편했던 당신을 둘에 담았다. 남편이 아들에게 조금만 더 잘했다면 난 당신을 덜 미워했을 텐데. 당신은 왜 그리 모질게 우리를 외면했을까. 뒤늦게나마 내 곁을 지킨 당신이 고맙지만 아들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니지. 용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아들을 이해하라고 나는 남편에게 줄곧 얘기했다. 그 얘기를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난 당신을 사랑했지. 남들이 뭐라 해도 내가 함께 병원에 가고 싶었던 건 당신, 함께 여행을 가고 싶었던 건 당신, 그리고 함께 집에 있고 싶었던 건 당신이었으니까. 당신은 알까. 나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을 위해 당신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었다는걸. 나 떠나고 나면 아들은 고아고 당신은 홀아비. 누구 하나 챙길 새도 없이 그렇게 두고 떠나고 싶진 않았는데 _ 아무래도 그건 내가 못할 것 같다.
후두두두. 빗소리가 들린다. 눈도 코도 입도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는데 귀만큼은 멀쩡하다. 오히려 더 잘 들린다. 후두두두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를 스치는 바람과 촉촉이 젖어드는 꽃잎의 소리, 병실 바깥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의 발자국 소리, 그리고 지쳐가는 동생과 남편의 숨소리와 저 멀리서 나에게로 찾아오는 아들의 울음소리까지도. 울지 말고 웃어 달라 하면 너무 큰 욕심일까. 오는 길에 예쁜 꽃다발을 사다 달라 하면 너무 큰 욕심일까. 이 모든 걸 알아 달라 하면 너무 큰 욕심일까. 매번 아들에게 바라는 거 하나 없다 했던 나인데 오늘만큼은 아들에게 바라고 싶다. 꽃과 미소를 선물로 가져오라고. 하긴. 나는 이미 아들에게 꽃다발도 받았고 미소도 받았다. 그거면 됐다 싶다.
아들. 엄마가 아들한테 정말 고마운 날이 하나 있어. 그게 언제인지 알아. 엄마 아프고 술 장사도 못하게 됐을 때 잠깐 식당에 일 다닌 적 있지.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고 설거지를 하느라 힘겨웠던 그때 아들이 온 거야. 엄마 생일이라고 꽃다발을 들고서. 그러면서 아들이 그랬어. 엄마를 보면 노란색이 떠오른다고. 그래서 예쁜 노란 꽃들만 골랐다고. 그때부터 엄마는 노란색이 정말 좋아졌어. 사실 내 생일인지도 몰랐는데 아들이 챙겨주니까 생일이 이렇게 행복한 날이구나. 그때 느꼈어. 뒷주머니에 반듯하게 접어둔 만 원짜리 몇 장 쥐여주고 급히 돌려보낸 아들이 안 보일 때까지 한참을 지켜봤어. 그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때 엄마 눈물에 꽃내음이 배었나 봐. 그래서 아들이 곁에 다가오면 항상 꽃내음이 나.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꽃내음이.
꽃내음. 병실 바깥으로 꽃내음이 난다. 아들이 왔구나. 그러자 죽음이 나에게 물었다. 마지막 소원은. 아들을 눈에 담는 일. 병실 문이 열리고 아들이 내 눈동자에 들어찼다. 내 생애 가장 마지막으로 맡은 아들은 꽃내음, 내 생애 가장 마지막으로 본 아들은 봄. 완연한 봄이었다. 그리고 이건 나의 마지막 봄이다.
삶을 정면으로 보고
언제나 삶을 정면으로 보는 것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것을 깨달으며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런 후에 접어두는 것
우리가 함께한 세월
그 세월은 영원할 거야
영원한 그 사랑
영원한 그 시간
/ 영화 [디 아워스] _ 버지니아
행간
내 생애 가득한 불행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라도
내 생애 자그만 행복은
엄마로부터 시작됐어 _
엄마는 나의 행복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