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었다. 엄마가 거기 있다고.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다.
엄마는 병원 침상에 누워 고통 속에 울고 있었고 간호사는 그런 엄마를 달랠 길이 없어 투약을 서두르기 위해 링거의 조절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통증인지 알 길이 없던 나는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가만히 서있었다. 거칠고 차가웠다. 엄마의 손을 그렇게 만든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그저 엄마라는 한마디 말뿐이라는 듯 계속해서 엄마를 불렀다. 나는 그 정도의 아들이었다.
통증이 차츰 가라앉고 잠결을 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을 때 의사가 엄마 곁으로 찾아왔다. 의사는 희끗한 머리 한쪽을 쓸어넘기더니 나에게 물었다.
"혹시 어머니가 평소에 드시던 약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대답할 수 없었다. 엄마가 밥을 먹는 일처럼 약을 먹는 일 또한 줄곧 지켜봐왔으면서 나는 엄마 입으로 들어가는 그 약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들의 입에 들어가는 것 하나하나를 챙기던 엄마인데 나는 그런 엄마에게 이렇게나 무심한 아들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나에게 의사는 괜찮다는 듯 살포시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의사의 손은 아주 따듯했고 내 어깨는 부끄러움에 움츠러들었다. 엄마가 위암을 이겨내고 왔을 때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통원치료를 다녔을 때도 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도 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해본 적이 없다. 교복을 입고서 엄마와 병원에 다니던 그때나 상복을 입고서 엄마의 영정사진 앞에 앉아있던 그때나 다를 게 없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엄마의 1주기에 숙모는 살아생전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올리자 했다. 음식을 고루 갖추고서 엄마를 그리워하는 자매들이 모두 모여 제를 올리던 그때, 엄마를 가장 아끼던 정은 이모는 나에게 젓가락을 쥐여주며 엄마 드시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 위에 올려두라 했다. 나는 생선전 위에 젓가락을 올려두었다.
엄마는 자신이 어린 시절 지내온 땅끝마을 해남으로 돌아가 맛있는 밥을 한 끼 먹고 싶다 자주 말했다. 운전을 못하는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밥을 해주는 일이 다여서 나는 가끔 엄마에게 밥을 해주었다. 내 키가 엄마보다 작았을 때는 미역국과 유부초밥, 그리고 카레를 해주었고 내 키가 엄마보다 컸을 때는 김치찌개와 닭볶음탕, 그리고 육전과 생선전을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엄마는 내가 해준 유부초밥과 생선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위암 수술 후 원체 소화를 못하던 엄마인데 내가 해준 유부초밥과 생선전은 남김없이 모두 맛있게 드셨다. 하루는 엄마의 입원실을 지키는 서울 이모에게 함께 드시라고 모둠전을 해다 드린 적이 있다. 생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있던 엄마는 겨우겨우 생선전 몇 점을 집어드셨는데 아들의 음식을 남기고 싶지 않아 바로 밑 동생이던 서울 이모에게 '자기 대신에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라며 신신당부를 했다더라. 엄마와 이모가 싹 비운 도시락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앞으로는 그 빈 통에 맛있는 걸 아무리 가득 채워도 엄마가 먹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울고 또 울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도시락통에 눈물이 가득 들어찰 정도로 울고 나서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고, 그 뒤로 엄마가 맛있게 밥을 먹는 일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그때 엄마는 내가 올려둔 젓가락으로 생선전을 맛있게 먹었을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정말 생선전이 맞기는 한 걸까. '아니야. 훈아. 엄마는 쪄서 말린 서대를 더 좋아하셔.'라고 했던 숙모의 말이 맞을까. 아니면 '아니야. 훈아. 엄마는 잡채를 더 좋아했지.'라고 했던 이모의 말이 맞을까. 누구의 말이 맞든 그때 내가 바라던 것 하나는,
'이제 더 이상 밥을 먹고 약을 먹는 일이 없기를.'
눈앞에 아른거리는 엄마에게 속삭였다.
악몽
꿈. 무슨 꿈. 무서운 꿈.
나의 꿈은 악몽이었지.
생처럼 생생한 악몽이었지.
무쉐뜨처럼 _
하루는 무쉐뜨 꿈을 꿨다.
홀로 세상에 남겨진 소녀가 모두에게 버림 받고
떼구르르 굴러 강물에 몸을 던진,
소녀 무쉐뜨 꿈을 _
꿈을 자주 꾼다. 흑백의 꿈을 꾸다가도 형형색색의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 꿈은 대부분 형태가 없어서 그저 색깔만 기억날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 꿈은 무쉐뜨의 생처럼 대부분 악몽이다. 그래서 오색찬란한 꿈만이 나에게 길몽처럼 여겨진다. 어제는 엄마 꿈을 꿨다. 엄마는 개나리색 한복을 입고서 이리 오라고 살랑살랑 손짓하고 있었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엄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어쩌면 저리 가라고 훠이훠이 손짓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도 웃고 있어서. 엄마가 웃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오늘의 글은 좋은 꿈으로 채워보자며 이것저것 쓰고 지우기를 반복해 보지만 결국 떠오르는 건 악몽이다. 어제 엄마 꿈을 꾸고서도 나를 지배하는 건 여전히 악몽이다. 뭐가 문제인 걸까. 문제 같은 건 없다. 어쩔 땐 끊이지 않는 악몽때문에 단명했으면 싶더라. 나도 배우 장국영을 따라서 향년 46세에 숨을 거두었으면 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조금 두렵기도 하다. 사실 많이 두렵다. 죽음이 두렵다기보다 죽는 순간이 두렵다. 엄마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병실에 누워 힘겨운 숨을 고르며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제발 나와 같은 악몽만은 아니기를. 엄마에게 주어졌던 악몽은 앞으로 남은 생동안 모두 내가 꿀 테니 그때의 엄마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악몽을 꾸겠다. 나의 좋은 꿈은 살아생전 엄마에게 넘기겠다. 지나간 엄마의 생에, 엄마가 나와 함께 했던 생에, 그토록 아팠던 생에, 좋은 꿈을 꾸었기를 바라며 엄마의 악몽은 모두 내가 받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