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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Aug 30. 2024

고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18

엄마 없는 하늘 아래는 차갑고 차가워서,

나는 온기 없는 천애 고아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살아가고 살아가고 해야 하는 거겠지.

할머니를 잃은 조제처럼

츠네오를 보낸 조제처럼






고아


나의 애도는 끝이 없을 테지만 이제 그만 깨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쉽진 않다. 그래서 내 모든 걸 뒤로 미루고 미루다 엄마 얼굴을 그리며 그렇게 울고만 있었던 걸 테고 _ 이쯤 하면 된 걸까. 이런 마음가짐이 정상인 걸까. 어쩌면 난 비정상의 생을 살아온 아들이라 하늘에 있는 엄마가 나를 외면하기 시작한 건 아닐까. 내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본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처받았을까. 그토록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봤으니. 아니. 어쩌면 불쌍했을까. 불쌍해할 거면 차라리 외면해 줘. 엄마는 이제 나 같은 아들은 잊고 그만 행복이란 곳으로 그 어딘가로 훨훨 날아가라고. 제발 그랬으면.


이제는 문장이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형식에 얽매인 삶 속에서 형식에 얽매인 글을 써오던 내가 형식을 탈피했으니. 내 인생의 의미는 온통 엄마였는데 이제 그게 사라졌으니. 모든 게 다 꺼져버렸다. 그래서 요즘은 나에게 꿈이란 게 있나 싶다. 꿈 하나만 믿고 살아온 나인데 도대체 그게 뭐였지. 소설가. 아니면 저널리스트.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아들이었나. 내 꿈은 어쩌면 엄마의 아들이었나. 이제 이룰 수 없다. 아니. 이룬 건데 끝난 건가. 그럼 내 꿈은 끝났다. 꿈이 끝나서 미련이 없나 보다. 생에 미련 따위 요즘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만 든다. 엄마는 나의 이런 일기가 불편할까. 마음 아플까. 할 수 없지. 이제 모두 지나버린 옛날이야기인걸. 내가 엄마의 아들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나를 누르고 있던 수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 건지 _

이젠 더 이상 괴롭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그래서 나도 이제 그만 엄마를 따라가고 싶다.

이제는 그저 죽기 위해 산다 싶다.


삶이라는 거 답답하고 갑갑하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생에 미련이 없는 걸지도. 엄마는 별이 됐다. 내가 엄마에게 선물하려던 미완의 책 제목처럼 엄마는 영화가 됐다. 언제까지고 돌려볼 수 있다 생각했다. 힘들 때마다 꺼내볼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남아있는 엄마의 사진 속 모습들은 내 것이 아니란 생각만 든다. 내가 놓아야 엄마는 그토록 아프고 아팠던 생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겠지. 그래서 결론은, 나도 데려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기도를 했다. 엄마. 나도 데려가. 여전히 엄마에게 생떼를 부리고 있다. 잠들면 아프지 않게 나를 데려가달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몹쓸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도했다. 몹쓸 짓인가. 그게 왜. 어째서. 잘 모르겠다. 이제 나의 꿈은 조용히 아프지 않게 생을 마감하는 일.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겠지.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는 꿈만 꾸면서 사는 기분이다. 지겨운 삶이라면서 끝내 할 일을 찾고 또 찾는다. 비겁하게도.


쓸 수 있을까. 쓸 수 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뭐든 기록해 보자. 고아의 길로 접어든 내가 고독을 감내하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화를 보며 글을 쓰는 일이다. 이거라도 하자. 그래. 이거라도 하다 보면 언젠가 죽음에 당도하겠지. 그럼 그땐 정말 조용히 아프지 않게 생을 마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내가 살 길은 죽음으로 걸어가는 길. 그 마지막 모습이 독거인이든 주정뱅이든 소설가이든 뭐든 되어있겠지. 


얼마 전은 내 생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걸 엄마에게 말할 수가 없다. 슬펐다. 엄마에게 축하한단 말을 듣는 일이 그렇게 따듯한 일인지 몰랐다. 곧 다가올 엄마의 생일에도 난 엄마에게 고맙단 말을 듣지 못하겠지. 그래도 난 엄마에게 전화하기로 했다. 엄마. 생일 축하해. 그렇게 얘기하기로 했다. 아닌가. 하지 말까. 엄마는 떠나야 하는데 나 때문에 못 떠나는 거면 어떻게 하나. 그러지 말자고. 이제 그만 엄마의 번호도 지우고 엄마의 휴대폰도 정지시키자 생각했다. 아직도 하지 못했다. 가장 끈끈하게 이어진 우리의 '전화'를 난 아직 끊어내지 못했다. 어디선가 전화를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지하지 못한 엄마의 번호를 이제 그만 끊어내야겠지. 엄마가 나를 위해 아끼고 아끼던 전화 요금을 이제 그만 내야겠지. 그만해야 한다. 내가 놓아야만 엄마는 엄마가 아닌 게 된다. 나의 엄마로 살면서 엄마는 무엇 하나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놓아야 한다.


그래도 엄마. 가끔은 그걸 기억할래. 엄마는 이번 생에 가장 잘한 일이 나를 만난 일이라고 했던 그 말을. 내 생이 엄마로 나뉜다면 이전 생은 아들이었고 남은 생은 고아. 앞으로 나는 고아일 텐데 다행히도 난 엄마 아들이란 꿈을 이루었다는 것. 지금껏 내 생에 이룬 단 하나의 꿈이다.



차츰차츰 비참해지겠지. 우울해지겠지.

그리고 터무니없이 고독해지겠지.

그래도 견뎌보겠다.






밤의 호수


슬픔은 어디에나 있어서 나는 도망칠 곳을 찾았던 것 같아 _

밤의 호수로 _ 그 무엇보다 깊은 밤의 호수로 _


새벽이면 공원의 밤호수로 향한다. 아무도 없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그저 혼자다. 말끔히 사라진 슬픔에 안도하며 벤치에 앉아 가만히 있는다. 그대로 몇 분이든 몇 시간이든 있는다. 하루가 온통 새벽이라면 며칠이든 있을 수 있다며 그곳에 있는다. 여전히 아무도 오지 않는다. 나를 찾는 사람도 내가 찾는 사람도 없다. 혼자다. 혼자라는 건 밤호수 같다. 깊은 밤호수.


언젠가 이곳도 혼자가 아닌 함께가 될 수 있을까. 없다. 없다고 단정 지으며 지금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운명 같은 건 우연 같은 것. 운명이라는 우연한 타이밍을 기다리며 밤호수에 앉아있을 때면 스치는 사람들 틈에서 너를 느낀다. 네가 아니어도 너를 느낀다. 두 번 다신 없을 너를. 한참을 기다리다 이 기다림이면 됐다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한다.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건 없다며. 이젠 없다며. 사람도 공간도 시간도 의미도 없다며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한다.


다시 일어난 아침에, 때론 늦은 점심에 또다시 삶을 살아가는 나와 마주할 때면 이질감이 든다. 이게 정말 나일까. 그저 밤호수에 앉아 검디검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내 모습만이 진짜 나인 것만 같아서 자꾸 물어본다. 나일까. 정말 나인가.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원에 가고 _ 그런 행동들이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지겹도록 가난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에서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모르겠다.


얼마 전에는 집중호우로 온몸이 젖었다. 소매와 바짓단 밑으로 빗물이 모여 뚝뚝 떨어졌고 마음만큼이나 몸도 무거워졌다.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밤호수로 향했다. 우산 하나 없이 걷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새벽을 걷는 사람들은 무서웠을까. 무서웠겠지. 어디에나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요즘 나는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무서운 사람으로 비치진 않았으면 한다. 난 그저 이상 행동을 가끔, 아니 보다 자주 보이는 어른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붙들고 납득시키고, 그렇다고 곱게 포장하고 싶지도 않다. 아니. 예전에는 포장하고 싶었다. 나를 예쁘게 포장하고서 타인들이 보는 내가 좀 더 아름답게 보이기를 바랐다. 언제부터였을까. 보이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게. 엄마가 떠나고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걷는 일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거 없이 터득하게 됐지만 말하는 일은  좀 달랐다. 난 좀 남들과 다르게 말했고 남들과 다르게 표현했으며 남들과 다르게 전했다.


술을 마시고부터 나의 이야기는 좀 더 형형색색이 되었다. 빨갛고 파랗고 그랬다. 아니. 내 친구의 말처럼 보랏빛이었다. 그래서일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나는 좀 두려웠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지라 말하는 사람들과 친해졌다. 역시나 그런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이해하진 못해도 잘 들어주었다. 그거면 됐다고 항상 생각했다. 지금도 변함없다. 생각해 보면 혼자 있는 밤호수만큼이나 함께 있는 술자리 역시 나에게는 소중한 언어의 자리였나 보다. 밤호수가 심연의 언어로 가득한 정원이었다면 술자리는 생의 언어로 가득한 정원이었다. 난 그곳에서 살아있음을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술이 잔으로 흐르는 맑은 소리와 잔과 잔이 부딪히는 쨍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많은 언어를 공유했다. 밤호수가 나에게 소유의 시간이었다면 술자리는 나에게 공유의 시간이었다. 그래. 있구나. 나에게도 있었어. 사람도 공간도 시간도 의미도.

그래도 여전히 나는 혼자다.


오늘은 안 오나 싶었어요.라고 그리운 사람에게 그리웠단 안부를 전하는 일은 없다.

엄마가 떠나고부터 그런 안부는 이제 정말 없는 일이 되었다.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밤호수에 앉아 눈물이 흐를 때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새벽에 졸린 목소리로 응. 하던 연약한 엄마의 목소리. 그토록 연약한 목소리가 나에겐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듣고 싶다. 들을 수 없다. 나 _ 정말 괜찮은 걸까. 모르겠다. 누울 때마다 나도 데려가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토록 서글픈 소원을 상냥하게 달래줄 이는 아무도 없다. 다시 밤호수로 간다. 이젠 정말 전화할 이도 없는 그곳에 앉아 나는 예전처럼 말끔히 사라진 슬픔에 안도하며 멍하니 있는다. 행여 그런 나를 본다면 하나의 언어를 던져줄 당신을 기다려본다. 하지만 역시나 알고 있다. 언어도, 당신도, 없다는 걸. 있는 건 그저 나와 이토록 검고 깊은 밤호수뿐.



혼자 걸을 수 있도록 연습을 하려고 해 보지만 소용없다.

신발도 없고, 지저분한 나의 발을 어루만져 줄 이도 더 이상 없다.


나 말이야.

잘 걷지 못하게 돼 버렸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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