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네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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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잃어버린 건 _
언제부터였을까
엄마가 떠나고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나에게 더 이상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난 누구의 아들도 아니니까. 그렇게 난 어른이 되었고 소년이었던 때를 잃어버렸다. 나의 소년은 끝났다.
끝났다고 해서 잊은 건 아니다. 여전히 엄마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언젠가 정말 머나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다면 그땐 잊어버리겠지. 그전에 엄마를 위한 애도 일기를 많이 남기자고 다짐해 보지만 지겨운 현실에 치여 가만히 있게 된다.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거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 그랬지. 정말이다. 이 고질병은 고쳐지지 않는다. 겨우 무언가를 쓰면서도 결국 마음에 들지 않아 훗날 지워버리기 마련이다. 그래도 엄마는 남겨두라 했다. 오래전 나의 소년 시절 일기를 고이 간직하던 엄마는 절대 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으라 그랬다. 그래서 아등바등 남겼다.
엄마는 술집에 나갈 채비를 마치고 내 일기 한 장을 훔쳐봤다 고백했다. 빨간 루주를 바르며 거울 너머로 나를 보고 장난스레 미소 짓던 엄마. 화사했다. 화사함도 잠시, 어두컴컴한 술집 조명 아래 앉아 연신 양주를 마시던 엄마는 우울했다. 어쩌면 나는 그 우울을 그대로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밝다고 했지만 알면 알수록 어둡다 그랬다. 중학생 시절 나는 학교가 끝나면 학원 가는 아이들을 가로질러 극장으로 갔다. 학교에서는 밝다고 친구들이 그랬는데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는 나는 어딘가 우울했다. 그래서 나에게 영화는 혼자 보는 일이 더 익숙하다. 친구들과 팝콘을 먹으며 장면을 공유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역시나 영화는 혼자 보는 일로 여겨진다. 엄마의 일이란 것도 그랬던 것 같다. 밤늦게 용돈을 받으러 술집에 들어서면 손님들 틈에 끼어있던 엄마는 비틀비틀 내게로 다가왔다. 술에 취해 휘청거리면서도 화사한 미소를 잃지 않던 엄마는 나에게 돈을 쥐여줄 때마다 우울로 그늘졌다.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 그런 날도 있었고 우리 아들 밤에 보니까 더 예쁘다 그런 날도 있었다. 서글펐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는 항상 서글펐다. 술이 좋아 술을 마시던 엄마는 아들을 위해 술을 마시게 되면서 인생이 서글퍼졌다. 난 이상하게도 그런 엄마가 좋았다. 아름다웠다. 웃음을 팔면서도 그 어두운 조명 아래 얼음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던 엄마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우아했다. 흙과 땀, 그리고 담배와 페인트 냄새가 밴 노역자들 사이에서 엄마는 명화 속 여신 같은 자태로 술잔을 들고 마셨고 우울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매혹시켰다. 매혹된 그들을 나는 몇 알고 있다. 알고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술은 엄마와 내 인생에 스며들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주 얘기한다. 마셔도 죽고 안 마셔도 죽으면 마시고 죽겠다. 술은 끊는 게 아니라 줄이는 거다.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나와 하루라도 더 함께 있기 위해 엄마는 술을 끊었지만 이제 난 그런 위대한 사람은 되지 못할 것 같다. 당신 아들을 위해 술을 마시고 다시 끊었던 엄마처럼 누군가를 위해서 술을 끊진 못할 테니까. 나는 이제 천애 고아로 살아가며 누군가의 아빠가 되진 못할 것 같으니까. 엄마. 엄마는 어쩜 나를 위해 그리 힘든 일들을 모두 해냈어. 가끔은 너무 궁금해서 꿈에서라도 묻고 싶어. 나를 본 일이 정말 가장 행복했던 일인지. 나를 위해 마시기 시작한 술을 다시 나를 위해 끊을 수 있었던 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럼 엄마는 답하겠지. 그저 답은 나라고. 당신 자신이 아니라 그저 나라고. 그럼 난. 나는 대답할 수 있을까. 온전히 엄마를 위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고. 그 무엇도 쓸 수 없다 생각된 순간에 엄마를 떠올리며 다시 이렇게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게 온전히 엄마를 위한 일이라고.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엄마. 엄마도 알겠지만 난 일기에 거짓말을 쓰는 그런 아이는 아니었잖아. 숨기면 숨겼지. 거짓을 쓰진 않았잖아. 그러니 엄마는 내 일기를 훔쳐보는 일이 즐거웠을 거고. 그렇지.
엄마가 훔쳐본 페이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무얼 본 걸까. 호기심에 불장난을 하던 그날의 일기일까. 아니면 외로워서 손장난을 하던 그날의 일기일까. 차라리 그런 날이었으면 한다. 모든 게 다 엄마 때문이라고 탓하던 그런 일기는 단 하나도 읽지 말았어야 할 텐데. 그게 진심이었다 해도 엄마는 몰랐으면 하니까. 장난스레 미소 짓던 엄마니까 아마도 아빠 지갑에 손댄 일이라든가 장국영처럼 좀 더 예뻐졌으면 좋겠다고 쓴 일이라든가 친구들이랑 다퉈서 속상했던 그런 날들의 일기였을 테지. 그리고 내 일기가 조금이나마 엄마의 미소가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다.
이제 난 그런 일기를 쓰지 못한다. 장난스러운 일은 나의 소년성과 함께 졸업한 느낌이다. 그런 거겠지. 내 일기가 온통 고통과 슬픔이었던 몇 년과 함께 엄마는 세상을 떠났고 앞으로의 일기는 고아의 일기라 불행 중 다행의 일로 쓰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드문드문 엄마의 기억이 글로 흐르는 날에는 나 역시 엄마처럼 미소를 지었으면 한다. 나로 인해 울던 엄마와 엄마로 인해 울던 나도 이제 졸업을 해야겠다. 술을 마신 새벽에 잠시 엄마의 얼굴이 스치면 그땐 다시 아이처럼 울겠지만 이렇게 앉아 글을 쓸 때면 엄마를 위해 웃을게. 고아인 내가 미아처럼 울고만 있다면 엄마가 힘들 테니까. 그래도 엄마. 엄마가 지닌 우울을 그저 슬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아들처럼 엄마 역시 그랬으면 좋겠어. 엄마의 우울은 아주 우아하고 고혹적인 것이었거든. 앞으로 나이 듦에 따라 나의 우울 역시 차츰차츰 엄마의 것과 닮아가겠지. 그러니까 너무 슬퍼마. 오히려 다행이라고. 다행이라고 그렇게 여겨줘.
계속해서 나의 글은 아무래도 슬프고 외롭고 아득한 것들로 채워지겠지.
엄마를 잃은 아들은,
소년을 잃은 어른은,
그러니까 나는,
끝나지 않는 엔딩크레딧처럼
여전히 캄캄한 터널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