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빌리 엘리어트 / 소년, 빌리
다들 접으려 하는데 너는 펼치는 구나
★★★★★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오프닝에 흐르는 노래는 T-Rex의 'Cosmic Dancer'다.
I was dancing when I was twelve.
내가 열두 살 때 난 춤을 추고 있었죠.
부끄럽지만 나 열두 살 때 꿈은 배우였다. 배우 장국영을 사랑한 나는 그에게서 연기를 배웠는데 그 역할은 주로 영화 [패왕별희]의 데이였다. 얇은 이불을 몸에 휘감고서 아리따운 별희처럼 걷고 말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것이 바로 내 생에 첫 연기 수업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소년답기도 하면서 소녀답기도 하다. '나는 본래 계집아이로 태어나 사내아이도 아닌데,'를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 태어나 계집아이도 아닌데,'로 자꾸만 틀리던 데이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나는 데이를 연기했다. 배우 장국영에게 데이가 운명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장국영은 운명이라 여기며 비디오를 되감고 되감았다. 반복된 재생으로 테이프는 늘어났고 비디오 가게 이모는 그리 좋으면 그냥 가지라며 나에게 주었다. 대여일이 3박 4일이라 매주 500원씩 내고 빌려봤으니 몇 만 원은 훌쩍 넘겼을 테다. 아니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영화 [패왕별희]는 상편과 하편으로 나뉘어 있어 천 원씩 내고 빌려봤으니 몇만 원이 아니라 십만 원도 넘겼겠다. 그러니 이모에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을 거다. 처음으로 내 것이 된 비디오를 돌려보며 연기 수업을 계속 재생해 오다 중학생 어느 지점에서부터 정지됐다. 그때부터 배우라는 꿈은 곰팡이가 핀 비디오테이프처럼 망가져버렸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제이미 벨)는 시도 때도 없이 춤을 춘다. 침대 위에서 폴짝거리며 역동적인 몸짓을 선보이던 소년은 윌킨슨(줄리 월터스) 선생님을 만나 유연하게 몸짓을 가다듬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발레 동작 '피루엣'을 성공하기 위해 돌고 또 돌던 빌리의 모습은 여전히 나를 두근거리게 만든다. 연습실에서도 화장실에서도 거리에서도 돌고 도는 빌리. 소년은 노력에 곰팡이 필 새 없이 되감고 되감는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정지시켜 버린 꿈을 빌리는 계속해서 재생한 것이다. 끝내 '피루엣'을 성공한 빌리의 입가에는 밝은 미소가 번지고 발레리노의 꿈은 한 발짝 도약한다. 그렇게 춤은 꿈을 앞서게 된다. 그 뒤로 빌리는 'I Love To Boogie'에 맞춰, 'Town Called Malice'에 맞춰 멋지게 춤을 춘다. 누가 보더라도 '춤이 꿈이구나' 인정하게 되는 몸짓으로 말이다.
빌리가 춤을 출 때 아빠는 석탄을 캔다. 빌리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연습할 때면 아빠는 탄광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승강기를 탄다. 아들의 꿈을 감당하는 아빠는 이리도 고달픈 삶을 살아간다. 내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 아빠는 나무를 심었다. 큰 트럭에 실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관광지로 가져다 정연하게 나무를 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의 월급은 아들의 꿈을 감당할 만한 액수였는데 도박과 술이 웬수였는지 불행도 막지 못할 정도로 줄어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와서 아빠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나 꿈에 취한 소년이었을 때 빌리처럼 어른들에게 생떼를 부린 적이 없다고 하진 않겠다. 간혹 꿈은 너무나 비싸서 아빠가 감당할 수 없는 액수와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빌리는 제 꿈을 춤으로 펼치듯 불만조차도 천연덕스럽게 펼쳐 어른들을 아프게 한다.
꿈을 접을 수밖에 없던 선생님에게 대들고,
"선생님은 실패했으니까!"
평생을 광부로 살아온 아빠의 생을 홀대한다.
"그저 광산 생각 밖에 못해요?"
그래도 빌리를 미워할 수 없는 건, 그 작은 날갯짓으로 겨우겨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소년이기에. 좀 더 큰 꿈을 펼치려는 소년이기에. 어른들은 곧잘 잊어버린다. 제 자신이 소년이었을 때도 꿈은 있었다지만 그 꿈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다행히 빌리 곁에는 그 꿈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고 있는 선생님이 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그 꿈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아 봐준 아빠가 있다. 날아오르는 빌리와 달리 또다시 탄광 밑으로 내려가는 아빠의 거뭇한 장면이, 여전히 권투장에서 발레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아릿한 장면이 비통할지라도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소년의 서툰 날갯짓을 온 힘을 다해 보살피는 어른스러운 영화다.
빌리가 발레리노를 꿈꾸는 만큼 나는 배우를 꿈꾸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으로 꿈꾸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배우의 꿈을 접었을 때 이미 다른 꿈을 펼치고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곳곳에는 매일같이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데이처럼 걷거나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빌리처럼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이 꿈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아챘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래도 찾은 게 어디야. 세상에는 아직 제 꿈을 찾지 못해 꿈을 찾는 어른들로 수두룩하다. 나는 찾았고 그래서 지금껏 글을 쓴다.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는 영화를 매일같이 보면서.
I'm still writing even when I'm thirty.
나 서른 살이 되어서도 글을 쓰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