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쇼핑할 때는 배가 고프면 안 된다. 배가 고픈 상태로 쇼핑을 시작하면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대충 물건을 구매하고 빨리 식당을 찾기에 바쁘다. 결국 올바른 소비를 하지 못하게 된다. 쇼핑 전 든든하게 밥을 먹고 평온한 상태로 쇼핑을 해야 꼼꼼히 둘러보며 원하는 물건을 제대로 구매할 수 있다. 배가 고프면 차라리 먼저 밥을 먹고 시작하는 게 맞다.
일반 물건을 사는 쇼핑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억대 이상의 값을 지불해야 하는 집을 살 때는 어떨까. 마음이 조급하면 정확히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것들도 비정상적으로 놓치고 만다. 보이스피싱의 수법들도 다 이런 셈이지 않나. 이거 좀 이상한데, 이게 좀 찝찝한데 싶었던 것들을 곱씹지 않고 그냥 넘기게 되면 이게 꼭 나중에 문제가 된다.
우리가 처음 시도한 빌라 매수 계약이 매도자의 단순 변심으로 파기되고 다시 심기일전해 새로운 매물을 찾아 나섰다. 저번에 매수할 뻔했던 빌라를 선택할 때 감내하기로 했던 단점들을 곱씹어보니 그대로 계약했으면 아쉬웠을 법한 조건이었기에 이번엔 이 부분을 고려해서 고르기로 했다. 그러자 그 빌라와 정반대의 매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지, 역세권, 엘리베이터가 있는 신축.
아마 집 구하기 어플을 통해서 매물을 보고 내가 먼저 연락했던 것 같다.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 왜 그랬니...)
매물을 직접 보고 싶다고 약속 날짜를 정했고 신랑과 집을 둘러봤다. 도보로 지하철역에 갈 수 있고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그전에 봤던 집보다 평수는 확실히 작았지만 깔끔한 신축빌라였다. 집주인은 이 빌라를 분양받아 입주 때부터 쭉 살던 신혼부부였다. 계속 낡은 구축과 언덕 위 준신축 정도만 보던 우리는 그야말로 요즘 스타일을 갖춘 신축 빌라를 보고 이성을 잃었다. 쾌적한 실내 인테리어, 깔끔한 엘리베이터, 햇살이 내리쬐어 밝고 환한 채광. 이 아름다운 곳에서 우리 세 명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우리는 전셋집 만기일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얼른 집에 대한 고민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바로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 왜 그랬니... 2) 처음 통화하며 컨택하고 매물을 설명해 주던 H부동산의 젊은 남자 담당자는 한 주소를 찍어주며 이쪽으로 오라고 했다. 알려준 곳은 H부동산이 아니라 D부동산이었고 나이 지긋한 여자 사장님이 있었다. 그때 약간 의아함을 느꼈지만 부동산끼리 이중 중개를 하기도 하니까 그런가 보다 싶었다. 나중에 예상된 바로는 H부동산은 바람잡이 느낌이고 계약이 성사되면 D부동산과 수익을 나눠갖는 것 같았다.
# 이게 그니까 말하자면 불법증축이긴 한데
D부동산 사장님은 기본적인 등기부등본과 계약 전 필요한 서류들을 뽑아주셨다. 그리고 집주인 부부가 오기 전 우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여기가 그 불법증축이라고는 들으셨죠? 이게 그니까 불법증축이긴 한데 사실 별로 신경 쓸건 없어. 그냥 벌금 나오면 벌금 내면 돼요. 일 년에 한 번 나오는데 집주인 분이 두 번 정도 내셨으니까 앞으로 아마 3번 정도 내시면 될 거야. 요새 신축에서는 다 그렇게 하거든. 그거 말고는 솔직히 신경 안 써도 돼. 아니 누가 일부러 신고하고 뭐 그럴 일이 뭐 있겠어. 그리고 대출받으셔야 한다 그러셨지? 일반 대출이 안 나오면 아마 추가로 신용 대출이 되는지 우리가 넣어볼 거예요. 우리가 아는 대출상담해 주시는 분들이 있거든. 그건 다 우리가 알아서 해드릴게."
지금 복기해 보면 부동산에서 무슨 저런 헛소리를 참 별일 아닌 듯 해댔었나 싶고 그 소리를 듣고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던 나 자신이 불쌍하고 한심스럽다. 무식한 건 죄가 맞다. 불법이라는 말을 듣고 아 그래요 네네 했다니 정말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하지만 역시 인생은 실전. 이 모든 것도 다 쓰라린 경험이었다.
집을 둘러볼 때 봤던 집주인 부부가 도착했다. 서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을 보내고 사인한 뒤 인사했다. H부동산의 젊은 남자 담당자는 호들갑을 떨며 분위기를 잡았고 하하 호호 좋은 인연이 돼서 다행이라고 즐겁게 대화를 마쳤다. 얼떨결에 두 번째 매매 계약서를 써 본 날이었다.
정말 뭔가에 홀린 듯 휘리릭 계약이 완료 됐고 집에 돌아왔다. 계약서를 쓰라고 억지로 강요한 사람도 없었고 상대방에서도 무언갈 감춘 거 없이 주요 키워드들을 다 우리에게 고지하기는 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홀가분하면서도 뭔가 찜찜하고 찝찝하고 신경 쓰였다. 자꾸 맘이 편하지가 않고 불편한 무언가가 꿈틀댔다.
# 이보세요 어디서 무슨 얘길 듣고 와서 이러는 거야
난 어떤 일에 대해 판단할 때 마음의 평안함을 기준으로 삼는다. 맘이 편하다는 건 내가 모든 걸 이해했고 알고 있고 인정한다는 뜻이고, 반대로 맘이 불편하다는 건 내가 뭔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는 거였다. 그 작은 찝찝함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밤새 빌라불법증축에 대해 검색했다. 불법증축 키워드를 치자마자 무서운 내용의 질문글과 답글들이 쏟아졌다. 읽어내려 갈수록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큰일 났다. 이거 진짜 큰일 났다. 어떡하지? 계약금은 이미 보냈고 계약서도 썼는데.
하나하나 설명 들었던 내용을 되짚었고 여러 정황들을 다시 생각했다. 냉정한 상태에서 그 내용들을 떠올려보니 이런 엉뚱한 애물단지를 무슨 정신으로 매수한 건지 멍청한 모습에 한없이 후회가 됐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H부동산 남자 사장님한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내가 '불법증축에 대해 알아보니 문제 되는 부분이 많아서 아무래도 너무 불안하다 계약을 취소하고 싶다'라고 했더니 대번에 목소리가 바뀌었다.
"아니 이보세요. 지금 어디서 무슨 얘길 듣고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다 얘기한 거잖아요 예? 모르는 거 없잖아요. 뭔 소리 하는 거예요 지금???"
그렇게 상냥하던 사람이 내 말 한마디에 공기가 달라지더니 험한 말들을 한바탕 쏟아내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너무 무서웠다. 안 그런 척했지만 내 목소리도 손발도 덜덜 떨렸다. 그 사람이 하는 말에 틀린 건 없다. 우리한테 모두 얘기를 했지만 우리는 그걸 듣고도 바보같이 계약금을 낸 거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D부동산 여자 사장님과도 통화했지만 그녀의 반응도 같았다. 이미 다 얘기한 내용인데 왜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그러냐며 안된다고 했다.
그 빌라의 매수가격은 1억 4400만 원이었고 벌금 3회를 더 낼 것으로 예상해 1회당 60만 원씩 총 180만 원이라 1억 4580에 샀다고 생각하면 될 거라는 얘기를 했었다. 벌금 3회 내는 것도 예상, 회당 벌금 금액도 예상치,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아마 그럴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나중에 되물으면 내가 그럴 것 같다고 했지 언제 확실히 그렇다고 했냐고 발뺌하면 그만인 셈이다. 이런 조건을 다 떠나서 무엇보다 '불법'적인 부분에 내가 가담했다는 게 찝찝했다. 나중에 이걸 팔려고 해도 우리처럼 멍청이를 데려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 하늘이 도운 대출 거절
계속 부동산에 전화해서 울면서 읍소도 해보고 부탁도 하고 내가 집주인을 직접 만나겠다고도 했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오히려 그 집에 함부로 찾아갔다가 경찰을 부를 거라는 협박도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미 계약을 뒤집을 수는 없고 그냥 울며 겨자 먹기로 그 가격에 들어가서 나중에 팔 수 있으면 팔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아무리 행복회로를 돌린다고 해도 최악으로 불안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한 푼이 소중한 신혼시절이었던 터라 계약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정말 벼락같이 기쁜 전화를 받았다. 웬일로 나를 겁주던 H부동산 남자 사장의 전화였다. 거칠었던 마지막 통화 때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정중하고 조용했다.
"그.. 대출이 안 나오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약을 진행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할렐루야였다. 신랑 소득 기준이 낮았는지 주택 담보로 걸려는 그 문제의 집이 불법증축이라서 그랬는지 이유가 뭐가 됐든 대출이 안 나와서 계약 진행이 안된다는 얘기였다. 대출이 안 나올 경우 공식적으로 계약이 무효되는 상황이라 계약금도 안전하게 돌려받는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포함했기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요즘 같은 시기 매수하기로 했는데 대출이 거절당해 안 나온다면 크게 낙심할 법 한데 그때 당시 대출이 안 나온다는 얘기가 어찌나 반갑던지 하늘이 도왔다고 기뻐했다. 우리의 계약금은 다시 안전하게 계좌로 돌려받았고 그 지긋지긋한 두 부동산 번호는 지워버렸다.
이번에도 두 번째 빌라 매수 실패가 됐지만 이번 건 또한 하늘이 도운 실패였다. 조금이라도 찝찝한 건 반드시 정확히 따지고 몇 번이고 두드리며 확인해야 한다. 나같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넘어가는 피해자가 없길 바라며 불법증축빌라는 생각도 하지 말기를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