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화에서 소개했던 그 '엘베 없는 5층 빌라' 전셋집에서 3 식구가 된 우리는 아이가 생기자 집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보다는 '나'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 신랑은 전세든 매매든 딱히 불만이 없었지만 나의 모성애가 더 짙어진 건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안정적인 집을 갈구하는 집착 아닌 집착이 시작됐다. 아무래도 아이와 단둘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이를 좀 더 안전하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 것이다. 그런 내 생각에 불씨를 지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신생아였던 아이를 잠깐 눕혀두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어디선가 커다랗고 시커먼 바퀴벌레가 아기가 누워있는 침대 한편에 내려앉아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누워있는 아이와 날개가 달린 바퀴벌레가 한 프레임에 담겨 시선에 들어왔다. 벌레를 정말 싫어하는 난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됐고 순식간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을 차려 필사적으로 재빠르게 아이를 안고 나와 그대로 방문을 꽉 닫았다. 그리곤 퇴근 중이던 신랑에게 목소리를 떨며 전화했다. 빨리 와서 제발 저 벌레 좀 잡아달라고. 결국 신랑이 와서 안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 그 후로 다행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집에서는 더 이상 아이와 함께 살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검색해 보니 날아다니는 바퀴벌레는 집 안에서 알을 깠다기보다 외부에서 들락거리는 형태가 많다고 했다. 미국 바퀴벌레라고 부르기도 하더라. 안방 창문 너머 옆 빌라를 보니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묶지도 않고 주방창 바깥으로 내놓았는데 그게 우리 집 창문과 맞닿아있었다. 여름이라 바람을 타고 냄새가 나기도 하고 딱 봐도 벌레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먹잇감이었다. 벌레퇴치업체에도 문의했지만 우리 같은 다가구 빌라에서는 우리 집만 소독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빌라 전 세대가 함께 퇴치작업을 실시해야 그나마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어디서 오는지 무엇 때문에 날아들어온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쾌적하지 않은 주거 환경이 그 요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때부터는 전세보다 매매로 시선을 돌려 다음 집을 알아봤다. 아이와 함께 계속 이런 수준의 전셋집을 돌아다닐 순 없다고 판단했다. 직방, 네이버부동산, 부동산카페 등등 온라인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매물들을 샅샅이 뒤져가며 시세를 파악했고 근처 부동산도 돌아다니며 매수 문의를 했다. 당시 아파트는 감히 생각도 못했다. 당연히 아파트는 불가능하니 우리는 빌라에서 시작해야 될 수준이라고 여겼다. 여러 매물들 사이에 나름 괜찮아 보인 집이 있어 눈으로 직접 확인하러 아기띠를 하고 나섰다.
# 오랜만에 본 집 다운 집
빌라촌에서는 건물 하나에 최대한 세입자들을 많이 받기 위해 공간을 조각조각 내서 억지로 많은 집들을 만들어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냉장고 자리는 물론 식사 공간도 안 나오는기이한 형태의 집 구조가 비일비재하다. 거주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집들을 보면서 심지어 이런 집을 사는데도 내가 직접 만져보지도 못한 1억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차가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공원 근처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빌라였는데 아쉽지만 그곳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이었다. 아마 그래서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나온 듯했다. 별 기대 없이 갔는데 다행히 계단이 높지 않아 생각보다 오르기가 수월했다. 5층도 살았는데 3층쯤이야. 내부 공간은 지금까지 봤던 매물 중 가장 훌륭했다. 억지로 쪼개지지 않아 정상적인 형태를 갖춘 집 다운 집을 정말 오랜만에 봤다. 방 3개에 거실 공간이 널찍했고 냉장고와 식탁을 놓을 자리가 반듯하게 있었다. 20평대 정도였는데 이만하면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울 때까지 지내기 꽤 괜찮다고 느꼈다. 빌라 외벽은 대리석 형태로 기존 구축들과 달리 준신식 스타일에 주차 자리도 확보돼 있었다. 근처 넓은 공원이 있어서 아이와 산책하기도 좋아 보였고 도보권에 초등학교도 있었다. 다만 살짝 언덕을 지나야 하고 지하철역까지 좀 걸어야 해서 마을버스로 오가는 게 더 나을 길이었다. 언덕 얘기를 했더니 부동산 사장님은 화들짝 놀라시며 이 동네에서 이건 언덕도 아니라고 이 정도 길을 언덕이라고 하면 안된다고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조건들을 확인해 보니 이 매물이 같은 조건으로 평지 역세권에 위치했다면 당연히 이 가격에 나올 수가 없었다. 저렴한 집은 다 저렴한 이유가 있다. 가격에 모든 게 반영돼 있는 것이다. 완만한 언덕길, 역과의 거리, 엘리베이터 없는 3층이라는 조건들을 감수해야만 이 매물을 선택할 수 있었다. 집을 보고 와서 한참의 열띤 토론 끝에 신랑도 나도 마음을 굳혀 그 집을 매수해야겠다고 결정하고 부동산에 의사를 밝혔다.
# 아니 팔긴 팔아야 되는데 아휴 모르겠어~
신랑은 이미 집을 보고 왔기 때문에 계약하는 날엔 동행하지 않고 나에게 모든 업무를 일임하고 출근을 했다. 대신 아이만 데리고 혼자 가야 할 나를 걱정해 시부모님이 동행해 주셨다. 나도 집 계약은 처음이라 시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던 것 같다. 계약 전 확인차 한번 더 집을 보기로 하고 시부모님도 함께 가셨는데 아이 키우기에 조용하고 괜찮은 집 같다고 격려해 주셨다. 매물 가격은 1억 4500에서 이사 100을 뺀 1억 4400으로 최종 조율했다. 부동산 사무실에 앉아 계약할 집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부동산 사장님이 어떤 전화를 받고 한참을 통화하시더니 곤란한 표정을 하고 소파 쪽으로 오셨다.
"새댁 그리고 어르신. 제가 좀 말씀을 드릴게요. 그 집주인 남편분이신지 남자친구분이신지가 자기랑 상의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집을 팔면 어떡하냐고 좀 그러셨나 봐. 그 집주인분도 팔긴 팔아야 되는데 아휴 모르겠다고 곤란해하시네요. 이왕 여기까지 계약하러 오신 거니까 헛걸음하시면 안 되고 저도 너무 죄송스럽네요. 우리 이렇게 합시다."
부동산 사장님의 설명은 이랬다. 일단 계약금 800을 보내서 우리의 매수 의사를 정확히 하고, 집주인 측에서 오늘 저녁에 최종 상의를 한 뒤에 확실히 진행하겠다고 하면 원래대로 중도금 잔금 치러서 매수하시면 된다. 그렇지만 집주인이 안 판다고 하면 아쉽지만 계약금만 그대로 돌려받는 걸로 하자는 거였다.
아니 우리 딴엔 엄청난 고민 끝에 일부러 시간 내서 계약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 책임감 없이 판을 뒤집나. 그럴 거면 대체 집은 왜 실컷 보여준 건지, 왜 집을 판다고 내놓은 건지 짜증과 불안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나를 보시고 아버님이 덤덤히 말하셨다.
"며늘아 걱정하지 마라. 이 집이 너희 집이 될 집이라면 순조롭게 진행될 거고, 아니면 다시 돈 돌려받고 다른 집 찾으면 돼. 절대 불안해하지 말고 맘을 편하게 먹어야 한다."
안 그래도 처음 써보는 매매 계약서에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겹쳐 허둥지둥했는데 아버님 말 한마디에 평정심을 찾았다. 사실 계약하려고 간 날 계약금만 걸고 이삿날 나머지 잔금을 치를 거로만 생각했지만 중도금도 걸어야 한다는 말에 당황했다. 한 푼 한 푼이 빠듯한 상황에서 아득바득 이를 맞춰 겨우겨우 돌아가게 만든 모양새였다. 혼자서 잘 찾아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인생 초보 새댁이었던 난 그날 혼이 쏙 빠지게 정신이 없었다.
# 결국 매도자의 계약금 반환으로 끝난 스토리
불안했던 예상대로 그날 저녁 매도자는 우리의 계약금을 돌려줬다. 짜증은 났지만 미리 매매 계약 연습을 했다 치면 된다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부동산에서도 정말 미안해하며 다른 좋은 집을 구해준다고 호언 장담했지만 왠지 그 부동산도 밉게 보였다.
빌라 매수를 실패했던 첫 번째 경험이었다. 신축 아파트를 매수해서 살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 빌라 매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다행이었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든 기회였다. 오히려 지금은 그때 집을 안 팔아준 매도자에게 고마운 마음도 조금 든다. 아마 그때 그 빌라를 샀더라면 어땠을까. 그냥 그 상태에 만족해 그대로 잘 살고 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을 더 낳으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을 때 과연 매도가 잘 이뤄졌을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이미 아파트 기준으로 생각하는 마인드라서 빌라 매도에 대해 그리 긍정적으로 보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집이든 다 각자의 집주인이 있다. 누군가에게 못난이 매물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인 매물이기도 하다. 싼 가격에 샀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싸게 팔면 된다. 그렇지만 이게 사람인지라 싸게 샀더라도 비싸게 팔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게 당연하다. 나도 그런 욕심과 고민들 때문에 놓친 기회들이 여럿있었다. 이후로 다른 집을 보는데 매도자 우위의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집주인 맘대로였다. 판다고 했다가 안 판다고 했다가 그 자리에서 얼마를 올리기도 하고 갑자기 다른 조건이 나오기도 하는게 부동산 시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케이스였다.
살면서 집에 관해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가장 확실한 건 어쨌든 계약이 될 집은 별일 없이 확실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근으로 중고거래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정말 구매 거래할 의사가 있는 사람은 단순하고 간단하다. "제가 할게요. 어디로 입금하면 되나요.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 이렇게 잔말없이 확실하다. 오히려 의사가 확실치 않은 사람들이 이건 어떻냐, 저건 어떻냐, 이걸 보여달라, 이걸 알려달라 등등 말만 많고 결정적인 행동이 없다.
준비되지 않은 매도자와 연결되지 않은 이 사건에서 많은걸 느꼈다. 매수자와 매도자의 태도에 대해 그리고 집을 사는게 쉽지 않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앞으로 나는 어떤 매수자, 어떤 매도자가 될지 생각해보며 적어도 집이라는 큰 덩어리를 주고 받는 거래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