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애 셋 데리고 공항에 마중가는 이유
신랑은 결혼하고 쭉 직장 생활을 했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매일 쏟아지는 업무에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 워크샵, 지방 출장, 해외 출장 등등 정말 쉽지 않은 업무 강도를 견뎠다. 물론 그렇게 얻어진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레벨 업해서 지금은 본인 사업을 하고 있지만 회사원일 때는 시간의 제약이 매우 컸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이 소중한 시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지만 회사에 메인 몸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 5인 가족을 먹여 살리는 외벌이 가장이니 더 묵직한 책임감이 있었다. 아이들이 잠든 밤늦게 왔다가 새벽같이 나가는 일이 많아 며칠간 아빠 얼굴을 전혀 못 보는 날도 허다했다.
그날도 야근하고 집에 와 잠깐 눈을 붙였다 새벽녘에 다시 부리나케 출근하는 신랑의 뒷모습을 보고는 자다 일어난 둘째가 말했다.
"아빠 안녕~ 또 놀러 와~"
그 말을 듣자마자 푸핫 웃음이 나면서도 뒤늦게 밀려오는 충격에 씁쓸했다.
아이에게 아빠는 우리 집에 가끔씩 와서 재밌게 놀아주다가 사라지는, 또 언제 만날지 모르는 인물처럼 느껴졌었나 보다. 그때부터 아이들에게 아빠가 없을 때마다 수시로 아빠에 대한 집중 강의를 시작했다.
아빠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 중인지, 아빠가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는지, 아빠가 우리 가족을 위해 왜 열심히 일하는지, 아빠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사람인지 등등 틈틈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력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신랑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이들을 문 앞에 쭉 세워 배꼽 인사를 시켰다. 특히 신랑이 멀리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공항으로 출동했다. 얼마 전에도 아이 셋을 다 데리고 공항에 마중을 나갔더니 주변의 크고 작은 시선을 받았다. 아빠가 나오길 셋이서 목 빠지게 기다리다가 입국하는 아빠를 발견하자마자 이산가족 상봉처럼 달려가서 매달리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온몸으로 반겼다.
번거롭고 시끄럽지만 굳이 그렇게 했다. 그런 시간들이 바로 아이들이 아빠에 대한 존경심, 올바른 이성관, 자신이 꿈꾸는 가정상을 키워나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쉽고 강력한 방법이라 여겼다.
내가 신랑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어쩌면 내가 바라던, 내가 갖고 싶던 아빠의 모습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행히도(?) 내 예상처럼 그는 재밌고 따뜻하고 현명한 아빠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딸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스킨십을 해주고, 누구보다 신나고 재밌게 놀아주고, 아무리 피곤해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책을 읽어주는 좋은 아빠다.
사실상 나는 아이들에게 좀 단호하고 냉정한 악역을 맡는 반면, 그는 한없이 따뜻하고 착한 역할을 맡는 게 억울할 때도 있지만 부부가 각기 역할을 맡아 가정교육의 균형을 맞춘다고 생각하니 적절한 포지션을 잘 맡았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아이들이 아빠와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내가 더 위로를 받기도 한다. 어린 시절 어렴풋이 내가 바라던 가정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럽다. 내 소중한 딸들이 내가 바라던 아빠의 모습을 한 아빠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는 광경을 보며 조용히 힐링을 받는다.
신랑이 결혼 초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는데 이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녀석이 바로 셋째 딸이다. 막내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첫마디로 아빠 어디 갔냐고 찾을 만큼 아빠를 좋아한다.
아빠가 있으면 요플레 뚜껑을 따주는 것도, 원피스 리본끈을 묶어주는 것도, 화장실 큰일을 보고 뒤처리 하는 것도 모두 꼭 아빠가 해줘야 한다고 고집부릴 정도로 아빠바라기가 됐다.
어느 날, 자기는 아빠랑 결혼할 거라고 나에게 당당히 말했다. 세 딸을 키우면서 이렇게 까지 말하는 딸은 처음이었다. 아빠는 이미 엄마랑 결혼해서 안된다고 했더니 바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차분히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빠처럼 나중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막내가 "엄마는 좋겠다. 아빠랑 결혼해서."라고 말하며 나를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이성이고, 부모를 보며 자연스럽게 자신이 꾸려갈 가정의 모습을 그려낸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를 가졌다는 것은 나아가 바른 이성관, 가정관을 가질 확률이 높다. 언젠가 딸들이 정말 아빠 같이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나에게 정말 큰 행운이자 로또보다 더한 축복일 것이다.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서 엄마 아빠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아이의 말이 우리 부부에게 얼마나 가슴 벅차게 감동적인 칭찬인지 모른다.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풍족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보다, 아빠와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따뜻한 기억을 줬다는 것에 뿌듯했다.
요즘 신랑은 애들 시집갈 때쯤 복리로 큰 선물을 줄 수 있는 자녀 주식 계좌를 만들겠다고 신이 났다. 자립할 세 딸들을 지원해 주기 위해 지금부터 열심히 돈을 굴려야겠다는 이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천방지축 그녀들이 알랑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