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예체능의 길은...
예전에는 아이들이 뭘 하든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찾아서 본인의 꿈을 펼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당연히 변함없이 동일하다.
그런데 사람은 참 약고 약아서 부모가 되어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가 혹시나 공부가 아닌 예체능의 길로 간다면 어떡하나 혼자 괜한 걱정을 앞서할 때도 있다.
8살 둘째가 갑자기 칠판에 쓱쓱 끄적이며 자기가 인사이드아웃의 불안이를 그렸다고 자랑한다. 내가 봐도 포인트를 잘 잡아서 그렸길래 한껏 칭찬을 해주고 기특한 마음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어댔다. 불안이 캐릭터를 보니 친한 친구도 생각나 카톡을 보냈더니 지인에게 답이 왔다.
"얘 혼자 그린 거야? 어머 미술 시켜야 되는 거 아냐?"
"어우 야. 그런 소리 하지 마. 무서워."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어디 영재발굴단에 나오는 것도 아닌데 혼자 지레 겁을 먹었다.
예체능의 길은 솔직히 평범하진 않다. 클래식의 세계는 레슨 선생님 컨텍부터 해서 여러 가지 관계들, 비용적인 측면, 아이의 재능과 노력들 그 모든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쌓아 올려져 꽃을 피운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여자임에도 소위 수염 날 때까지 홍대에서 밤새 입시 미술을 준비하던 친구를 보며 정말 대단하다 싶었다. 미술도 물감비를 포함해 실로 어마어마한 비용이 깨진다고 들었다. 주변에 야구, 축구를 시키는 지인들을 만나 얘기해 보면 그 분야에서는 또 예상치 못한 세계들이 펼쳐졌다.
입시가 전부는 아니지만 대입을 기준으로 따지고 보면 그냥 공부로 대학을 가는 것이 어쩌면 가장 평범하면서 경제적(?)인 방향인 것 아닌가 싶다. 물론 학원비와 인강비, 교재비, 타고난 머리, 본인의 노력, 엉덩이 힘, 학습에 대한 태도 등등 일반 공부 하는 학생에게도 많은 인풋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예체능의 길은 정말 다른 세계가 있으니까. 하긴 세상만사 쉬운 일이 뭐가 있을까.
첫째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가 좋다고 지인에게 얻어 입은 발레복을 입고 집에서도 제법 발레리나 흉내를 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아파트 커뮤니티에서 발레도 배워보고 마트 문화센터도 다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뭔가 전문적인 걸 경험해 보는 게 좋겠다 싶어 본인이 그토록 원하던 발레와 한국무용을 함께 가르치는 무용학원 정규반에 등록했다. 자세 교정, 스트레칭을 시작으로 여러 발레 동작으로 작품도 완성하며 재밌게 다녔다. 한국무용도 함께 하며 대회 준비를 했다. 하지만 무용의 세계도 만만치 않았다. 기본 학원비 외에도 대회 참가비, 안무비, 메이크업비, 의상대여비 여기에 원하시면 연습 때 아이들 간식 넣어주셔도 된다는 무언의 압박감까지. 입시도 아니고 그냥 학원에서도 이 정도인데 전공으로 가면 얼마나 더 할까 싶어 그쯤에서 멈췄다.
아이는 이제 발레와 무용을 넘어 아이돌이 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처음엔 농담처럼 받아들였다가 요새 꽤 진지해지는 것 같아서 경계하는 중이다. 그냥 평범하게 자라길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이기적인 걸까. 전교생 200명 중에 1등 하는 게 전국 몇천 명 중에 1등 해야 하는 아이돌보다 훨씬 쉽지 않겠냐며 어설픈 설득도 해본다.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소리 같지만 부모가 되어보니 현실적으론 생각보다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나 예체능의 영역은 정신적, 재정적인 것을 포함해 전반적인 서포트가 많이 필요한 분야인 것을 알기에 소심한 엄마 입장에서는 선뜻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실용음악 입시의 길에 발을 담갔다가 타고난 재능충들과 어마무시한 연습량의 벽을 경험하곤 나는 도저히 이걸 이겨낼 만한 깜냥이 아니라고 판단해 포기했다. 실제로 내 주변엔 서울예대에 수석으로 입학한 사람을 포함해 정말 잘하는 실력자들이 꽤 있었고 그 때문에 일찌감치 현실을 직시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뒤늦게 일반 고등학생처럼 공부 쪽으로 전향해 인서울을 했고 졸업한 뒤 나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러다 신랑을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별일 없이 그냥 평범한 인생이었다. 도전과 불안함을 거부하며 최대한 안정형을 추구하는 나의 성향상 어쩌면 아이들에게도 나와 같은 길을 종용하고 있었나 싶다.
말로는 아이들에게 너네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하면서 정작 아이들이 원하는 걸 얘기했을 때 진짜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문해 본다. 아이가 미술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같이 미술관 전시회를 찾아가서 다양한 작품들을 본다거나 유튜버가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법이라도 가르쳐주는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믿고 지지해줄 수 있을까.
넌 꿈꾸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엄마아빠가 뭐든 다 도와주겠다고 클리어하게 말하기엔 나도 너무 세상 때가 많이 묻은 것 같다. 나처럼 평범한 인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아이만의 특별한 인생을 살겠다고 선택했을 때 주저함 없이 응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을지. 아직은 나에게도 미지의 영역이라 감을 잡을 수 없다.
당장은 오늘 본 받아쓰기 채점 결과를 보고 아이에게 잘했다 칭찬해 주고, 수학 수행평가에서 틀린 문제를 함께 풀어보며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역할에 충실해야겠다. 그리고 아이들이 엄마아빠를 떠올렸을 때 세상 어느 곳, 누구보다 편하고 따뜻하다고 여기는 정서적 만족감을 한가득 채워주는 부모의 자리를 잘 지켜야겠다. 그러면 아이가 공부를 하든 예체능의 길을 걷든 아이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