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닮아도 걱정, 안 닮아도 걱정하는 이유
영어가 좋아서 영문과에 간 내 친구는 자기 아들이 알파벳을 A부터 Z까지 똑바로 못 쓴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난 그녀의 빡침(?)을 충분히 이해한다. 국어를 좋아하던 나도 내 딸들이 받아쓰기를 하며 어디서 당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랄한 단어들을 써댈 때 단전에서부터 묵직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누군가는 아직 아이가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다른 것보다 이상하게 난 유독 거슬리고 불편하다. 수학이나 체육 같은 다른 분야는 몰라도 국어만큼은 좀 더 깐깐하다고 할까.
'아니 진짜 왜 저러지. 내 DNA를 조금이라도 받은 내 딸이라면 이 지경일 수가 없는데.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럴까. 이럴 수가 있나?' 하며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특히 엄마는 자기 자식과 본인을 동일시 여겨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즉, 자식을 별개의 존재로 대하지 않고 나와 동일한 존재로 이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말을 전에도 들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최근 내가 가장 많이 하던 생각과 맞닿아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내 딸이지만 엄연히 그 아이도 독립적인 존재이고 나와 다른 인격체인데 너무 나와 연결 지어 판단하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내 딸이라면 국어를 잘해야 돼, 너는 내 딸이니까 나와 다를 리가 없어, 나도 그렇게 했으니 너도 그렇게 해야 돼라는 식의 논리다.
드라마에서 빌런으로 나오는 최악의 엄마 캐릭터들이 많이 하는 대사였는데 나도 모르게 비슷한 생각을 갖고 아이를 대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가질수록 아이에게 더 많이 화내고 더 혼내게 될 뿐이었다.
세 아이 중 특히 둘째는 성격적으로 나와 가장 많이 닮은 모습을 보인다. 속상하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하지 않고 눈만 껌뻑 거리며 할 말을 꿀꺽 삼키고 꾹꾹 억누르는 게 보인다. 왜 그러냐고 말해보라고 하면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린다.
지금은 나이도 먹고 결혼해서 애 낳은 아줌마가 되다 보니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지만 나도 어렸을 때는 둘째 아이 같은 경우가 많았다. 속상한 맘을 속시원히 으다다다 말도 못 하고 그냥 혼자 삭히고 마는 거다.
하필 나한테서 가장 닮지 말았으면 하는 모습이 내 아이에게 그대로 보일 때 가장 당황스럽고 속상하다. 어쩌면 둘째 아이가 그렇게 나와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답답해서 더 다그치고 열변을 토하는 지도 모르겠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야지. 네가 말 안 하면 아무도 네 마음을 몰라. 자꾸 표현하고 조금씩 말하는 연습을 해야 돼."
마치 예전의 나에게 스스로 말하듯 아이에게 말한다. 그렇게 아이에게 한참 일장 연설을 하고 뒤돌아서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왜 하필 닮아도 그런 걸 닮았을까.
육아는 참 어렵다. 날 너무 닮아도 걱정, 너무 안 닮아도 걱정이라니. 요 근래 들어 아이들에게 화내는 경우가 잦아서 고민이었다. 모든 생각을 정리해 결론을 내렸다.
그래, 너희와 나는 다르다. 나는 이 씨, 너네는 박 씨. 우리는 성씨가 다른 존재이니 나와 같을 리가 없다. 내 딸이니까라는 식의 연결 고리를 끊고 그냥 아이 개별마다의 존재로 인식하기로 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엄마는 어렸을 때 학원 하나 안 다녀도 잘했는데 넌 학원을 보내주는데도 왜 이 모양이냐, 엄마는 양치질 안 하면 너무 찝찝하던데 넌 왜 지저분하게 양치질을 제대로 안 하니 등등 식의 나를 기준으로 아이를 판단하는 못된 말버릇도 당장 스톱이다.
아이가 받아쓰기 100점을 맞아오면 내 딸이라 국어를 잘한 게 아니라 아이가 미리 받아쓰기 연습을 하고 공부해서 그런 거다. 아이가 그림을 잘 그리면 손재주가 있는 아빠를 닮아서 그런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주의 깊게 관찰했고 그걸 그대로 표현하고 싶어서 스스로 여러 번 그려낸 결과인 것이다.
아이를 나와 좀 떨어져서 생각하니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시야가 조금씩 생겼다. 그래도 여전히 불쑥불쑥 내 기준으로 아이를 판단하고 가르치려 들 때도 있다. 그때마다 계속 다시 상기시킨다.
잊지 말자, 자식도 남이다.
나는 이씨, 너네는 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