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의 누르스름한 하늘이 산등성이에서부터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갔다. 시댁에서 돌아오는 차 안, 조수석에서 보는 하늘은 피곤한 듯 천천히 쪽빛 장막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저 바깥 풍경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만히 오래도록 하늘을 지켜본 적이 참 오래간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동하거나, 씻거나, 집안일을 하거나 할 땐 습관처럼 주변에 핸드폰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내 명의의 핸드폰이 생긴 이후로 하늘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강의나 오디오북으로 지식을 채우거나, 명상 오디오 클립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거나, 그도 아니면 유튜브 동영상으로 재미라도 얻어야 했다. 모든 틈새 시간이 지식, 안정, 재미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빈틈없이 메워져야 했다.
'며느라기'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딸'도 아닌 내가 시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책을 읽거나 동영상을 보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오늘 낮엔 그저 멍하니 앉아있다, 이야깃거리가 생각나면 아가씨와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다, 그마저도 끊기면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잤다. 효율의 시간으로 꽉 들어찬 내 집이 고속도로라면, 시가 친척과 만남의 시간을 보내는 시댁은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패인 비포장도로 같았다. 어디가 파여있는지, 그걸 어떻게 피해야 하는 지조차 모르는 엉성한 시간에 그저 덜컹덜컹 엉덩이를 맡기고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내가 머리가 굵어질 무렵 엄마가 항상 강조하던 말이 있다.
"여자는 일이 있어야 해. 돈줄이 있어야 기 펴고 살 수 있어. 넌 절대로 일 그만두지 마."
전업주부로 생활하며 남편에게 무시당했던 엄마의 한풀이 같은 말버릇이었다. 부지런한 그분의 생활신조이기도 했고. 내 속에 들어와 자리 잡은 엄마의 말은 낭비한 시간에 대한 죄책감을 만들었다. 흘려버리는 시간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면 뒤돌아서 혹독하게 스스로를 자책했다. 대학 졸업 후 구직 시절엔 정도가 지나쳐 식이장애까지 온 적도 있다.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잘 돌아가고 있지만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법을 찾아야했다. 그러다 아이를 낳았고, 기계는 고장이 났고, 육아휴직 후 퇴사를 했다.
완전한 퇴사 후, 그러니까 엄마가 말한 대로 일을 그만두고 내 인생의 존엄을 포기한 후에도, 나는 일을 대신할 다른 것을 들고 있어야 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모임에 나가고, 철학과 경제를 공부하고. 이렇게 꽉 찬 생활 속에서 일을 대신할 다른 돌파구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달리는 차 안에서 어둑해진 하늘을 보다 보니 문득 의문이 솟아올랐다. 그동안 하늘을 이렇게 오래 본 적이 언제였더라? 나는 엄마의 단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기준에 맞춰 그에게서 벗어난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하늘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집에 도착한 나는 또 강의를 틀어놓고 샤워를 했다. 과거에 들어왔던 말과 습관으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러나 가끔 하늘을 보면 멈춰야 할 때를 상상할 것이다. 하늘과 내 생각과 과거 문장 속에서 문득 어느 하나를 집어 내 선택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와 하늘을 보며 하는 선택이 뒤얽혀... 마침내는 어느것이 과거로부터 영향을 받은 선택인지 헷갈리는, 진짜 과거에서 벗어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