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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Jun 25. 2019

초면에 실례지만 뻥 좀 쳐도 될까요?

그 일은 90년 여름, 능곡의 빨간 벽돌 빌라에서 벌어졌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각자의 시간을 즐기던 주말 아침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10분이 넘도록 초인종을 누르며 문을 두드렸다. 아빠는 방에, 엄마는 화장실에 계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도 내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깥의 누군가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계속계속, 아무런 아무런 말도 없이, 죄없는 현관문만 두들겨 팰 뿐이었다-초인종 소리가 문의 비명처럼 들렸다- .


“곧 열어드릴게요! 부모님이 일 보고 계세요!”

바깥에 서 있는 이에게 답하고, 엄마를 부르고, 방에 계신 아빠를 조르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온 집안을 빙빙 맴돌아도 아무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라고만 했다. 초인종 소리에 답해야 한다는 압력과 별 설명 없이 그저 기다리라는 지시 사이에서 초딩의 사고체계에 오류가 났다. 덜커덕, 걸쇠를 풀고 혼자 문을 열어버렸다.  


그날 먼지 나게 맞았다. 화장실에서 시간을 끌던 엄마는 허리춤을 붙잡고 뛰쳐나와 몇 분 동안 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다 겨우 돌려보냈다. 그리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며 효자손으로 날 엄청나게 두들겨 팬 후, 맨발 바람으로 쫓아냈다.  


범상치 않은 초딩이라면 그 자리를 이탈했겠지만, 난 범상했다. 현관 손잡이를 한 시간 넘게 붙잡고 울다 지쳐갈 때쯤, 삐거덕 문이 열렸다. 아빠였다.

아빠 :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나 : “...”

아빠 : “왜 네 맘대로 아무한테나 문을 열어? 나중에 혼자 있을 때도 그럴래?”

나 : “아니요…”


아빠는 암구호를 숙지시키듯 상황극을 만들어 반복했다.

아빠 : “(현관 밖에서) 똑똑똑”

나 : “누구세요, 엉엉”

아빠 : “부모님 계시니?”

나 : “(방으로 뛰어가) 엄마 누가 찾아요, 흑흑”

엄마 : “없다고  해.”

나 : “(문을 향해) 없대요~”

아빠 : “아니 그게 아니고!”

여덟 번째쯤 돼서야 아빠를 만족시킬 대사를 외울 수 있었다. 대낮에 시작한 소동이 어둑해져서야 일단락되었다. 단순무식했던 나는 외부인을 경계하라는 맥락은 잊고, 어떤 상황엔 거짓말이 허용된다는 사실만 기억했다.-여기서 ‘어떤 상황’이란 모호해 다방면에 적용 가능했다- 그 사건은 훌륭한 거짓말 입문 수업이었다.


절친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고도 인기가 많았다. "기다려, 거의 도착했어."(이후 한시간만에 도착)라던가, "너 여드름 어제보다 엄청 들어갔다!"라던가.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은 대본을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양 얘기하며 사랑을 받았다. 학력을 위조해서,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도 숨겨, 떠들썩하게 뉴스에 나온 어떤 이는 또 아무렇지 않게 지상파에 나와 웃고 떠들며 돈을 벌었다. 그들을 보며, 거짓말은 쓰는 사람에 따라 선도, 악도 될 수 있을뿐 그 자체는 악이 아님을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래픽 툴을 만질 줄 안다는 건 회사의 온갖 문서를 위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토렌트에서 다운로드해, 크랙으로 라이선스 인증을 한 포토샵으로, 참 많은 문서들을 짜깁기했다. 송장, 견적, 인증서류 등등. 급기야 회사 사람들은 나를 “야매 인생”이라는 싼마이스러운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불만은 없었다. ‘거짓말로 밥 벌어먹는 직업’이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키치를 사랑하는 나의 취향과 딱 맞아 떨어졌다.  아빠의 혹독했던 거짓말 수업은 이런 미래를 내다본 선견지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글쓰기를 알게 되었다. 글쓰기는 신세계였다. 타이핑만 가능하다면 모든 걸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기존 문서와 동일한 폰트를 찾고, 깨진 픽셀을 맞춰가는 쩨쩨한 포토샵 작업과 차원이 달랐다. 일례로, 사람들은 이 글의 첫 문장부터 믿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쉽고 짜릿한 거짓말인가! 하지만 안심하길. 이 글은 거짓이 아니다. 그만큼 가짜 글을 만들기 쉽다는 경고였을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주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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