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e Sep 16. 2019

둔감함에 대하여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2019' 리뷰

「사실 피해자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 꺼려한다.」

이 한마디가 면도날처럼 슥- 내 몸 어딘가를 베었다. 나는 피해자가 아닌가? 그래서 내 피해 사실에 대해 떠들고 있나? 이십 대엔 직장 내 성희롱에 시달렸고, 삼십 대엔 가사 육아 분담으로 치열하게 분투했음을 이야기한 게 그저 분란을 만들기 위함이었나? 애써 평온한 이곳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소심하고, 그가 은연중에 비쳤듯이 사람들은 시끄러운 걸 싫어하니까. 빨간 피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걸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연휴 내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도서관에서 빌린 후 읽을 시간이 없어 질질 끌다 결국 반납기한이 닥쳤기 때문이다.-분명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p7)

우선 이 책은 나도 가해자일 수 있음을 선언하며 시작한다. 그래, 나도 알게 모르게 나보다 약자를 차별하고 있었겠지. 그게 업보처럼 돌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라며 감수한다.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p79)

차별받는 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끊임없이 이야기 함으로써 이슈를 끌어내는 것뿐이다. 그게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고,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해야만, 귀를 기울이고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걸 듣는 것이 불편하다면, 그건 당신이 기득권에 있다는 증거이지, 문제 제기를 꺼내는 당사자가 불편충이기 때문이 아니다.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p171)

왜 너만 시끄럽게 떠드냐고 묻는다. 우리 엄마는, 내가 아는 다른 여자들은 모두 조용히 삭혔는데 너만 이렇게 유난이냐고 묻는다. 그녀들이 입을 다문 덕에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던 지하철 변태들, 직장 내 성희롱 가해자, 그리고 며느리의 손으로 차려진 제사상. 나는 정말 없애고 싶었다. 적어도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길 바랐다. 나는 아닐지라도 내 두 딸이, 또 다른 여성이, 그것에 둔감해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길 원했다.


여기까지 읽자 머리가 아파왔다. 속이 메슥거리고 한기마저 들었다. 나는 감히 시댁에서 앓아누웠다. 그것도 추석 당일에.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아프거나 실패하거나 어떤 이유로건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p187)

5년 전에도 약자의 목소리가 있었다. 40년 전에도 있었고, 100년 전에도 있었다. 그들이 입 다물고,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고분고분 순응했다면 나와, 반대 입장의 누군가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한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반응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p189)

결국은 ‘대화’가 해법이었다. 서로에게 귀를 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이야기를 듣고 나 또한 가해자가 아니었는지 돌아보는 것. 극단적인 페르소나만이 드러나는 글에서 보이는 게 다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 글에 너무 깊게 베였다.  


소수자의 이익은 다수자의 피해라는 끝도 없는 논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평등을 지연시키는 논리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나에게 유리한 차별은 괜찮고 나에게 불리한 차별은 안되다는 이해관계만 남는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공존의 조건으로서 평등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고정된 ‘옳은’ 삶을 규정하지 않는 이 해체의 시대가 버겁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는 인류가 지속적으로 갈구하는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p204)

나 또한 권리 향상을 제로섬 게임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편해지면, 네가 불편해질까? 그럼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여자인 걸까? 내가 목소리를 내면 듣는 너는 괴로울까? 내가 밥을 차리지 않으면 다들 굶을까? 아니, 내가 아파 일어나지 못해도 밥상은 알아서 척척 차려졌다. 며느리 없이도 다들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그렇게 이 반을 꼬박 앓아눕고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쓴다. 베인 자리가 시퍼렇게 멍들었으나 딱지가 생겼다. 그러나 아팠다. 대답을 해야만 두통이 완전히 사라질 것 같다. 왜 분란을 만드냐고? 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냐고? 듣기 불편하다고? 당연하지. 그걸 의도한 거니까. 자꾸 듣고, 아 이게 잘 못 일수도 있겠구나. 잘 못 걸리면 x 되겠구나. 찔려하라고. 그러면 나는 당했더라도, 더 이상 피해자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


아무도 싸우지 않는 평온한 사회는 평온한 사회가 아니다. 그 밑에는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계속 예민하게 굴고, 시끄러운 글을 쓸 것이다. 이젠 내 얘기뿐만 아니라 또 다른 시끄러운 이야기에도 귀 기울일 것이다. 책에서 내린 결론대로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기에. 그 공포를 극복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기에.

https://www.vop.co.kr/A00001434878.html




배경 (c) 창비 트위터

매거진의 이전글 '젠더 토이', 그리고 '성 역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