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소설 #스쿠버다이빙 #오픈워터 #자격증 #위로 #감동 #여행
가라앉아도 괜찮아.
새벽 4시, 필리핀 공항에서 2시간 남짓 비포장 도로를 달려 겨우 도착한 숙소. 조금이라도 잠을 자보려 노력했으나 새벽 내내 울어대던 수탉의 울음소리에 은수는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저 놈의 모가지를 따 버리고 싶었으나 이내 날이 밝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은수는 바로 스쿠버다이빙 첫 번째 자격증, 오픈워터 이론 수업을 시작했다.
감압병, 질소 마취, 등 은수는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악의 최악을 생각하다 보면 현실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고, 그 정도의 상처는 덤덤하게 넘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을 터득한 은수였지만, 최악의 최악을 생각하는 동안 밤새 심장에서 뛰어놀던 자그마한 밤톨 가시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지구와 달은 공전, 자전 주기가 같아 지구에서는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밤새 은수가 삼키고 삼켰던, 가시는 은수의 심장에 뒤에 꽂혀있을 것이다. 심장의 공전과 자전이 지구와 같을 리 없을 텐데 어째서인지 은수의 상처는 지구에 발을 딛고 있는 그 누구도, 심지어 은수 본인조차도 볼 수 없는 아픔이었다.
“강사님, 저는 수영도 못하고 물도 무서워해요.”
부정적인 말을 내뱉었지만 은수는 못하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배운 적 없었다. 진실을 거짓인양 거짓을 진실인 양 내뱉고 살았다. 사수의 퇴사로 큰 프로젝트를 혼자 맡게 되었을 때 은수는 못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담은 그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책임을 오롯이 은수의 몫이었다. 잘한 것보다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은수는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못한다고 말할 걸,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 걸, 차라리 주저앉아 버릴걸.’
“잘한 건 말씀 안 드려도 아실 테니까, 피드백을 위해 아쉬웠던 점을 중점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한 것은 왜 피드백에 포함되지 않는 걸까. 사실, 잘한 점을 도저히 찾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이라는 대표의 말에 은수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은수는 목적을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속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
“은수 씨 벌써 퇴근해?”
“네, 퇴근해요. 내일 뵙겠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 퇴근시간에 짐을 쌀 때면 대표는 은수에게 항상 질문을 건넸다. 일은 할만하냐는 둥,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는 둥. 은유적인 표현의 속 뜻을 눈치가 없던 은수는 알아낼 길이 없었다. 차라리 야근을 하고 가라고 말했다면 은수는 짐을 풀고 다시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그저 일은 할만하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다. 정직한 답변이 정답인 줄 알았다. 말에 의도를 넣어 돌려 말하는 방법을 은수는 알지 못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은수는 직설적이고 간결하게 의사표현을 했고, 주위 사람들은 직설적인 말과 태도에 때때로 상처받기도 했지만 뒤끝 없이 해맑은 은수를 좋아했다.
매일 반복되는 은유적 표현에 은수는 지쳐갔다. 그때는 별말 아니었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말이 자신을 비난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도 많았다. 한 마디 한 마디 숨어있는 숨어있는 작가의 의도와 뜻을 해석하는 4점짜리 언어영역 문제는 퇴근 종이 칠 때까지 매일 계속 출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