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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 Hana Jul 22. 2020

폴리아모리의 정조

욕망에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 용지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나혜석이 1935년에 쓴 문제의 그 구절이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이 지나치게 남용되어 나혜석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 구절만 떼어 쓰는 데서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정작 글의 앞, 뒤를 보면 이때 나혜석은 이혼 후 금욕 생활 중이었고, 앞으로도 금욕 생활을 하며 파리에 가서 우아한 여자로 살겠다고, 약간은 처량한 마음 다짐을 하는 내용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 봤음직한, 이 문구만 알고 있다가, 대략 2년 전 그녀가 그토록 그리던 파리에서 책을 읽었다. 그때 마음 한 구석에, 금욕 생활을 하며 외치는 성적 자유가 아니라, 폴리아모리로써 가지는 정조에 대해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자리 잡았다. 


나는 파리에서 오르가즘 명상이라는 발랄한 이름의 21세기 캘리포니안 명상을 가르쳤다. 대략 2007년부터 당시 파트너와 뭐가 되었든 전통적인 일부일처제 관계는 아닌 걸로 합의하고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내 사적인 성생활의 역사에 대해서 시시콜콜 늘어놓지는 않겠지만, 딱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하게 말하건대,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정말 감사하게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후회가 없다. 


폴리아모리라는 말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고춧가루 마냥, 사람들에게 경기 비슷한 걸 일으킨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고? 그럼 나는!' 순간적으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은데,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은 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 다른 사람의 욕망, 또는 내가 억눌러온 나의 욕망이 안전을 위협하리라는 무의식적인 공포는 서양이든 동양이든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감정이다. 욕망을 더 이상 위험한 것, 금지된 것, 또는 억눌러야 되는 것으로 보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면, 서로의 욕망을 존중하고 '1+1=3' 이 되는 새로운 문법의 관계를 함양하기로 결심했다면, 이제 중요한 주제는 초등학생처럼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라, 정조를 지키는 것이다. 


나혜석에 따르면 정조는 '그 인격을 통일하고 생활을 통일하는 데 필요'하다. 폴리아모리 정조의 핵심은 욕망에 솔직할 수 있는 용기다. 그 용기가 폴리아모리의 생활을 통일하는 필수 요인이다. 예를 들어, 나는 폴리아모리인데 나와 연애하는 상대에게 그 말을 못 한다면, 그건 그냥 폴리아모리라는 말을 빌려다 자신을 정당화하는 비겁한 심보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에 솔직할 수 있는 용기는 꼭 폴리아모리가 아니어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걸 말하면, 내 파트너가 나를 싫어할 거야, 어쩌면 나를 떠날지도 몰라, 이걸 들키면 어떡하지?' 코칭을 하다 보면 이런 두려움을 안고 사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이런 욕망이 성적으로 휘황찬란한 판타지인 경우는 사실 별로 없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커플이 있는데, 한참 이야기한 끝에 남편이 진심으로 표현한 욕망이 '내가 개를 데리고 산책 나갈 때, 당신이 좀 더 자주 같이 나갔으면 좋겠다'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욕망이었다. 그 순간, 나도 부인도 그 사람이 진심이라는 걸 느꼈고, 우리 모두 심장이 살짝 녹는 것 같은 따스함을 느꼈다. 


당신이 파트너에게 진심을 숨길 수록, 당신이 느끼는 욕망을 수치스러워하고 억누를수록, 사실 당신과 파트너 사이는 조금씩 멀어진다. 당신이 아는 것, 밝은 양지에 있는 것보다는 당신이 모르는 것, 억누르고 음지에 숨기는 것이 항상 더 위험한 법이다. 내면적으로는 '내 파트너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게 나아'라는 일종의 부정적 자기 암시가 강화된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바라는 걸 말하는 건 사실 꽤나 어려운 일이다. 바라는 마음이 클수록, '잘못되면 어쩌지'란 두려움도 크기 때문에, '말할까, 말까'에서 꽤나 오랫동안 망설이게 된다. 그래서 바로 그 순간에 용기가 필요하다. '그 인격을 통일하고, 생활을 통일하는 데 필요'한 용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억눌러온 욕망들을 감히 입에 담을 용기. 적당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으로 나를 꾸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 보이겠다는 용기. 내 파트너가 사랑을 선택하리라는 희망찬 용기가 필요하다.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리던 억세고 줄기찬 한 계집년. 나혜석은 그토록 바라던 파리에 결국 다시 오지 못했다. 그녀가 쓴 글을 읽으면 매번 가슴이 절절 끓는다. 정조와 사랑을, 욕망과 성적 에너지를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능수능란하게 구워삶아 먹을 수 있는 신여성의 도래를 기원한다. 



Photo by Ramón Salinero on Unsplash

내가 읽은 책,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2018, 민음사. http://minumsa.minumsa.com/book/1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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