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 Hana Jul 21. 2020

요가와 나

수행하는 이유

내가 경험한 21세기 파리와 런던은 영적 웰빙에 대한 깊은 열망으로 가득했다. 세상에 이런 게 있는지 몰라서, 알기 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던 활동을 많이 했다. 그중에 수행을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예가 요가일 듯싶다. 


처음엔 요가를 매우 싫어했다. 명상, 세러피, 전통 의식, 에너지 치료, 감정표현과 대화 방법 코칭 등등 사람의 상상력이 허용하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영적 웰빙 활동들이 널려 있었으나 탄트라, 차크라, 요가처럼 산스크리트어 어원의 활동들은 왠지 모르게 거슬렸다. 명상 수련회 따라가서 아침에 요가 수업을 하면 나는 'no, thanks’로 일관하고, 혼자서 국민체조 비슷한 유튜브 스트레칭으로 대체했다. 거슬린 이유를 굳이 꼽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두, 세 가지만 적어보자면, 먼저 요가 선생의 목소리 톤이 거슬렸다. 이건 한 주에 요가를 2-3번은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내가 좋아하는 선생 수업만 골라 간다. 내가 싫어하는 그 목소리 톤을 묘사하자면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하달까. 한쪽 뺨을 치면 '나의 영적 에고를 위해 다른 뺨도 부디 때려주세요' 할 것 같은 목소리, 그러니까 현실감각이나 분명한 의식보다는 몽환적인 선의에 가까운 목소리, 설탕으로 떡칠한 디저트 같이 기만적으로 부드러운 톤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로 도저히 자음의 순서를 분간할 수 없는 산스크리트어를 남발한다고 생각해 보라. 소름 돋는다. 


두 번째로, '이걸 꼭 산스크리트어로 써야 해?'라는 자문이 들 때, 그러니까 자국어로 표현하기 불편한 것들을 산스크리트어로 돌려 말한다는 인상을 받을 때 거슬렸다. 여자의 성기를 요니나 버자이너, 한자어인 자궁이라고 부르면 별 느낌이 없지만, 순수 한국어인 보지라고 부르면 갑자기 사람들 얼굴이 붉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녀 관계, 몸과 성에 대한 수행에 탄트라를 그냥 형용사처럼 붙여 소개하는 걸 많이 봤는데, 탄트라가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짚어주는 사람은 정작 별로 없었다. 산스크리트어로 표현되는 인도, 티베트 지역 영적 전통 자체의 깊이와 풍부함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게 결코 아니다. 적당히 신비롭고, 적당히 애매모호한 타국어로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예를 들어, 쿤달리니 자각을 할머니한테 어떻게 설명할 텐가? 물론 수행을 오래 하신 경륜 있는 분들은 어린애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능숙하게 설명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소화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우회하려 산스크리트어를 남발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봤다. 


요가 수업에 집중하기에는 내 머릿속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너무 컸다. 요기들의 통실통실한 엉덩이와 쭉 빠진 허리라인이 부럽긴 했지만, 산스크리트어로 자학하는 일은 평생 없으리라 다짐했던 나에게 이년 전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비크람. 40도씨, 습도 40%의 한증막에서 한 시간 반 동안 하는 이 뜨거운 요가의 가장 큰 장점은 너무 덥고 습해서 도무지 머리로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 처음 비크람 수업을 들었을 때, ‘내가 과연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도대체 저 자세를 여기서 어떻게’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다. 요가 선생의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고, ‘서구 사회의 신비화된 인도 문화 소비 방식’처럼 뇌를 5g 이상 써야 할 것 같은 비판적 사고는 전혀 할 수 없었다. ‘살아 나가려면 꼭 코로 숨을 쉬어야겠다.’ ‘억지로 안 해도 된다고 하니, 이번 자세는 그냥 좀 누워 있자.’ ‘이 자세는 쉬워 보이니 잠시 흉내라도 내볼까.’ 그렇게 한 시간 반을 겨우 견디고 요가 스튜디오를 나서는 순간, 평균 기대 수명보다 한 세기는 족히 더 살 것처럼 몸이 가벼워진 걸 느꼈다. 죽을 고비를 넘긴 듯한 만족감과 땀을 쭉 빼고 맑아진 얼굴을 기록하기 위해 처음에는 비크람 수업을 들을 때마다 셀카를 찍어두었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좋았다. 


코로나 때문에 요가 스튜디오가 문을 닫은 요즘도, 나는 집에서 꼬박꼬박 비크람을 한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지는 않아도, 내 몸은 안다. 내가 스스로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는 걸. 그리고 이 점이 내가 수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누가 하라고 해서, 누가 하면 좋다고 해서, 아니면 누구보다 잘하려고, 또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서 하는 일,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누가 뭐라고 해도 가만히, 조용히, 아랑곳 않고 나를 위해서 계속하게 되는 일. 심지어 내 머릿속에 비판적 사고가 딴지를 걸더라도, 몸으로 느껴서 좋은 걸 알기에 멈출 수가 없는 일. 어려운 자세를 따라 하면서 내 몸에 주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만 바라보면 쉽게 넘어진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듣지 않고, 억지로 힘을 주면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사고 나기 십상이다. ‘넌 아무리 해도 안돼’, ‘꼬락서니가 이게 뭐니’ 등등 자학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니 대응하지 않고 조용히 씹어 준다.


수행에는 목적도 실패도 없지만, 계속하다 보면 무언가 꾸준히 좋아진다. 요가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전에도 들었고 앞으로도 종종 생기겠지만, 요가를 그 자체로 즐기는 매 순간의 충만감에 비하면 그런 사심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내 머리는 분명한 성과가 없는 행위를 지극히 싫어해서 처음에는 요가를 꼭 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냈다. '비크람으로 근력과 인내력을 길러 사업 대박 내야지', '나도 저 여자처럼 동그란 모양의 엉덩이를 갖고 싶다', '10년이 넘도록 흡연했으니, 독극물을 좀 빼내야 하지 않을까.' 등등 그렇게 되면 감사하고, 아니 되어도 딱히 할 말은 없는 여러 종류의 동기부여를 했다. 하지만 비크람을 계속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몸에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이 좋으면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좋았다. 그 가치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지난주에는 잘 되던 자세가 이번 주에는 잘 안되어서 잠깐 시무룩할 수는 있어도, 요가를 하고 나면 안 한 것보다 항상 기분이 더 좋기 때문에 그냥 매트에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성공한 게임이었다. 몸이 찌뿌둥 하든, 생리를 시작하든, 기분이 특별히 더러운 날이든 물병 들고 시간 맞춰 요가 매트에 누워있는 것, 90분 동안 눈물이 나든, 성질이 나든, 몇 자세나 따라 하고, 몇 자세나 쉬든 상관없이 거기에 있기만 하면 된다. 


내 몸의 상태나 감정에 상관없이 의식적으로 꾸준히 나와 같이 있는 것, 내 맘대로 안되더라도 호기심을 가지고 나 자신과 천천히 친밀한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이 내가 생각하는 수행이다. 계속하다 보면 내 몸에 이런 근육이 있었나 싶은 곳에서 새로운 힘의 근원을 발견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나름 잘 되는 자세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려운 점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수행은 항상 기대하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다. 내 머리가 상상한 영역을 참 자주 벗어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날마다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쉬면서 몸을 1mm 좀 더 유연하게 할 여지를 찾는 비크람처럼, 매일매일 나 자신과 시간을 보내며 나를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할 길을 찾는다. 


요가를 재료 삼아 신나게 설명했으니 이제 다음 글에서 성과 관계에서 수행이란 어떤 모양인지 본격적으로 다뤄보자.  




Photo by Yannic Läderach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이혼 접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