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째 아들은 유난히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 사춘기 시절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도가 지나치다는 데 있다. 사춘기에는 막을 수 없는 호르몬 변화 때문에 체취가 난다고는 하나, 제 몸의 냄새가 계속 난다고 의식해서인지 옷을 빨고 또 빨고 그랬다. 몸에 털이 많은 것도 콤플렉스로 생각하는지, 제모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쓴다. 저 혼자 그러는 거야 뭐라고 할 수 없는데, 귀찮을 정도로 괜찮냐고 계속 주변에 물어본다. 내가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은데도 말이다. 목욕도 한 번 하면 30분은 족히 넘는데, 남자들의 평균으로 따지면 정말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을 같이 써야 하는 큰 아이와 아침에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꽤 있다. 화장실에서 30 분 이상 지체하면 여지없이 빨리 나오라며, 두 형제가 입씨름을 시작한다.
나의 아버지는 40년 넘게 택시 운전을 하셨다.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인 아버지가 아직도 경제활동을 하시는 모습이 대단하시다 여기고 있다. 다만, 노령에 운전이 괜찮을까 걱정하곤 한다. 그런 걱정이 기우라는 듯 우리 집 남자 셋 그러니까 아버지와 나, 그리고 동생 중 가장 건강한 사람은 놀랍게도 아버지다. 몇 해 전 종합 검진에서도 거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깨끗하다며 좋아하셨다. 정작 나의 건강 검진 종합 소견서에는 온통 '추적과 관찰'의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는데, 우리 집이 이사를 해 집들이 오셨다가 우연히 나의 검진 결과를 보시곤 혀를 차셨다.
"아니, 젊은것이 늙은 아버지보다 몸이 엉망이면 어쩌니.."
진심 걱정 어린 표정으로 아버지는 아들 건강을 염려하시는데, 참 대단한 노익장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택시 운전을 한 만큼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그중 나와 관계된 일도 종종 있었다.
2008년 겨울, 내가 과장쯤 되었을 때 일이었다. 유난히 일본 손님이 많은 회사라, 그날도 어김없이 광화문 호텔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2차 자리로 이동하려는 참이었다. 마침 그날 밤 갑작스러운 눈이 내려 도로는 대혼란이었고, 여간해서 택시를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할 수 없던 나는 12차선 도로 가에 나가 지나는 택시를 잡으려 애를 썼다. (그때는 택시 호출 앱이 없었다!) 그런데 멀리서 구세주처럼 한 택시가 내 앞에 바짝 붙어 섰고, 나는 택시를 타자마자 '서울역!'을 외쳤다. 그런데, 갑자기 택시 기사님이 나를 보고는,
"엇? K 아니냐?"
아버지였다. 서울 시내에서 아버지의 택시를 우연히 탈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런 기적이 내게 벌어졌다. 짧은 거리를 타고 가는 와중에 일본 본사 친구들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자, 본사 사람들은 처음엔 거의 믿지 않는 표정으로 연신 '혼또니(정말로)? 혼또니?'를 외쳤다. 그러다 분위기가 진지해지자 아버지께 예를 갖추어 배꼽 인사를 했다. 그날의 일을 두고 나중에 아버지는 키도 크고 멋지게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는 놈이 도로 한복판에 나와 위험하게 택시를 잡고 있길래 불쌍해서 차를 댔더니, 그게 아들이더라 하며 웃으시곤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이 우리 일본인 사장에게까지 알려졌다. 대를 이어 가업을 승계하는 일본이야 부모님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사장은 나의 스스럼 태도에 감동했다고 했다. 그 후로 가끔 우리 사장은 회식자리를 마치고 귀가할 일이 있으면, 전용 자가용을 놔두고(기사님도 회식을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아버지 택시를 불러 댁으로 귀가하곤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고, 오히려 힘든 택시 운전을 하면서 날 키워 주신 아버지께 고마운 마음이 더 커졌다. 타인의 눈을 의식할 필요는 전혀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지금의 나조차 어릴 때는 그러지 못했다. 당시 나는 가난한 우리 집을 너무 창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인천에서 살다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었다. 부모님은 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걸 원하셨고 그런 편이 아들에게 더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서울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은 했는데,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던 것은 우리가 이사 간 동네가 허름한 판자촌이었다는 것이다.
새로 우리가 이사 간 동네는 마침 학교를 가는 도중에 있는 나지막한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인 무허가 건물 구획이었다. 속칭 '브로꾸'라고 불리는 종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시멘트 벽돌과 회색 슬레이트 지붕의 전형적인 산동네였다. 심지어 동네 마당에는 공용 화장실도 있었다. 문제는 내가 아침마다 그 판자촌 마을에서 내려와 큰길에 있는 등교 대열에 합류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하필 남녀 공학이었던 탓에, 매일 아침 내가 허름한 판잣집에서 나오는 모습을 여학생들이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너무 창피했다. 다들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뿐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우리 가족 모두를 창피하게 생각했다. 아파트 파출부를 하시는 어머니의 잿빛 유니폼, 학교 정문 앞에서 몸뻬를 입고 부처님 파마로 중무장(?)한 할머니도 그랬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만 종합 선물 세트로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뀐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다. 타인을 의식하고 그에 따라 감정의 파도를 타며 생활하는 삶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가난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받아들였다. 가난한 것은 우리 부모님이지 내가 아니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도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기울어진 판에서 불리한 쪽에서도 제일 끝에 위치해 있던 내가 다른 사람들 하고 비슷하게만 해내도 굉장히 잘하고 있는 것이란 자기 암시로 정신 승리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는 곧 자기 효능감을 넘어 자존감으로 발전했다. 정신과의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에서는, 성장이란 자존감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라 설명했다. 돌이켜 보면 긴긴 세월 나도 그랬던 것 같다. 판잣집에서 누가 볼까 불안했던 마음도 사실은 수련의 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누가 뭐라고 해도, '뭐 어때? 그래서 뭐?'라는 자세를 우리 아이들도 가졌으면 하고 바란다.
아침마다 30분이 넘게 머리 모양과 피부를 가꾸시느라 여념이 없는 먹깨비 둘째 아드님아! 또 무슨 꼰대 이야기냐고 하겠지만,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는 게 아니라,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너를 어떻게 달리 보느냐가 중요하단다, 알겠니 막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