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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배웁니다 Jan 16. 2017

어떻게 살 것인가

원칙을 준수하는 삶

유시민의 책을 읽었다. 2013년에 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다. 이 책은 유시민이 공식적으로 정계은퇴를 한 후 삶과 죽음이라는 큰 주제를 갖고 인생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룬책이다. 참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삶과 죽음을 갖고 대하는 그만의 관점이 내가 늘 생각해오던 주제와 매우 흡사하여 읽는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오늘은 책에 대한 서평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책 중 가장 눈에 띄는 한 구절을 갖고 이야기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그가 칸트의 구절을 인용했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그동안 내 삶의 원칙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일까 늘 궁금해왔었는데,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전율이 왔다. 이 한 문장이야말로 내 인생, 삶과 원칙, 내가 앞으로 살 방향 그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완벽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30년을 살면서 나만의 원칙을 확립했고 그 원칙을 준수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 원칙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에 새기고 있고, 그 원칙의 보편성에 대해서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원칙은 아래와 같다.


첫 번째는 ‘비움’이다. 인간은 늘 비우면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항상 ‘욕심’이라는 벽을 마주하곤 한다. 문제는 그 욕심이라는 벽은 한번 넘으면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점점 더 크고 높은 욕심이라는 벽이 계속 생겨난다. 결코 충족되지 않는 벽을 계속 넘어가다 보면 어느덧 삶의 황혼기를 맞이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20대 중반까지 이 욕심 때문에 삶이 참 괴로웠다. 왜 그토록 원하는 것이 많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는지. 늘 끊임없이 뭔가를 원하는 나 자신이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다. 삶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 질 때도 있었다. 이대로는 결코 앞으로 잘 살아나갈 자신이 없었다. 서서히 내려놓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나를 비우고 깨끗해지는 법을 알게 되었다. 늘 비우고 살기 때문에 삶의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이 매우 길어졌다. 잠깐 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늘 쉽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움’은 체화되어 나와 한 몸이 되었다. 이제 내려놓음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내려놓음, 비움이라는 개념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사상’과 굉장히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궁금증이 생기시는 분들은 한번 찾아보시길)


두 번째는 ‘오늘을 살자’이다. 늘 몇 년 뒤 혹은 십 년 뒤 미래를 생각했다. 십 년 뒤 미래는 행복 해지겠지 내가 오늘 이렇게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시기가 왔지만 나는 또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또다시 그날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고자 했다. 감정의 풍요는 사치이고 오늘이 수단으로 전락하여, 늘 어느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고 그것이 좌절되거나 혹은 잘 되고 있을 때에도 잘 풀리는 것을 빌미 삼아 어쭙잖은 선민의식에 자주 빠지고는 했다. 어느 순간 깨달음이 또다시 다가왔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그 순간’이라는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구나. 결국 인생은 항상 오늘을 반복하는 것이구나. 우리는 매일매일 죽고, 새로 태어남을 반복하는구나. 오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좋은 것을 보며 기뻐하고, 슬픈 일에 마음껏 슬퍼하고, 오늘이라는 축복을 만끽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구나. 내가 오늘을 살지 못하는 순간 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그저 껍데기만 남게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는 오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혹은 이따 옛 직장동료를 만나 소주 한잔 할 때 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임을 이제 알고 있다. 집중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리고 삶에 대해 더 진지해졌다. 삶이란 것은 정말 ‘선물(present)’이구나. 우리는 ‘지금’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풍요를 만끽하며 살아야 되는 것이구나. (예전에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카르페디에 감동받은 이는 많다. 하지만 그 단어가 각자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는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세 번째는 ‘사람은 모두 대등하다’이다. 나는 어르신과도 대등하고 초등학생과도 대등하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대등하다. 어떤 상하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의견과 생각은 그 나름의 존중받아야 될 이유가 있다. 어떤 금전적인 혹은 명예적인 많고 적음이 사람의 레벨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차원의 평면 속에서 존재하며 각자 살고 싶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다. 나는 x축으로 가고 싶어서 그러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누군가가 y축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서 누가 높거나 낮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에서 한 걸음씩 늘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힘들면 쉬고, 기운이 팔팔하면 뛰어다닌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각자의 몫인 것이다. 내가 걸어가고 뛰고 멈춤을 결정한다. 누군가의 경쟁 속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삶은 오늘을 살아감에 있어서 목적이 아닌 수단의 삶으로 오늘을 변질시킬 수 있다. 아마도 불행해질 것이다. 특히 오늘의 풍요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더욱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가 누구를 이기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연대하는 것이다. 서로 함께하는 것이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도우면 된다. (여기서 주지 할 것은 늘 행위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참조) (대등이라는 개념은 아들러 심리학 서적(기시미 이치로 저)에 소개된 내용이다.)


이 세 가지 원칙 모두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난 오늘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 원칙을 준용하며 살아갈 것이다. 오늘 행복하지 않고 목적이 수단으로 변질돼버린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살 자신도 없다. 늘 오늘의 소중함을 만끽하며 살 것이다. 그것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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