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죄가 어디 홀로 지어지는 건가요 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죄짓고 사는 건데
저들의 큰 죄 속에는 제 자신의 죄가 스며들어 있고,
제 욕심과 비겁함과 힘없음이 저들을 더 크게 더 걸칠 것 없이
죄짓도록 부추겨온 건데요
제 자신이 먼저 참되고 선하고 정의롭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 평화와 정의를 바랄 수 있겠어요, 도둑 마음이지요
가진 자들의 이기심과 부정부패는 사납게 비판하면서도
왜 제 자신의 탐욕과 작은 부정들은 함께 보지 않았을까요
왜 네 탓이오 네 탓이오만 외치고 제 탓이오가 없었을까요
...
왜 저는 못 갖는 한이 아니라 안 가지는 긍지를 지닌 떳떳한 인간으로,
진실로 당당한 노동자로 사회정의와 평등을 요구하지 못했을까요
첫눈 내리는 오늘밤에야 제가 자유의 몸이 된다니까
지난 삶이 부끄럽게 돌아봐지네요
좋은 세상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전 솔직히 공짜로 바란 거예요
좋은 세상, 좋은 세상 하면서도 사실은
가진 자들의 부귀와 능력을 시샘하면서
좋은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몫의 행복을 훔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며 살아온 겁니다
-<서, 그 여자 앞에 무너져내리다> 중에서
자본주의가 삶의 본연이라면
사회주의는 삶의 당연이 아닌가요
삶의 본연을 긍정하지 않는 사회주의가 진보할 리 있겠습니까
삶의 당연을 품에 안지 못한 자본주의가 진보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을 갖지 못한 현실이 허망하듯 현실을 떠난 이상도 공허한 거지요
삶과 인간과 현실 변화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얻기까지
나는 ‘아무 주의자’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주의자’입니다
나는 지금 분명히 ‘한 생각’을 다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극단을 내 온 삶으로 끝간 데까지 밀고나가
정직하게 몇 번씩 목숨을 던져주며 처절하게 참구 정진해온
한 생각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세 발 까마귀> 중에서
...박노해의 문학은 모순과 그 모순의 구조를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노동자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노동자 문학이다.
-도정일
체의 평전을 읽고 박노해의 묵상을 읽으니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져 몇 번 눈물이 맺혔다.
두 사람에게서 느낀 것은 이념이 아니라
진짜 뼛속까지 박힌 의식, 진심, 박애, 절개와 같은 것.
생생하고 울림이 있는, 삶으로 보여진 그것이었다.
일상의 한 조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길어 올리는 나와 비교되어
너무나도 부끄러웠던,
2020년의 어느 오전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