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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May 24. 2022

겨울을 너머 봄으로

<안나 카레리나> / 톨스토이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계속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이해하기 좀 힘드실 거예요. 당신들,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남자분들은 자기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 경우에도 뚜렷하죠. 그러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의 처녀는, 여자답고 처녀다운 수줍음을 지니고 당신네 남자분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버리는 처녀로서는 자기 스스로도 알 수 없고 뭐라 말해야 좋을지도 모를 감정을 경험하는 일이 흔히 있기 마련이죠.”


 ‘나는 도대체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온 것인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살아갈 수도 없다.’ 레빈은 자신에게 말했다.

 ‘무한한 시간, 무한한 물질, 무한한 공간 속에 물거품과 같은 하나의 유기체가 창조되고, 물거품은 잠시 동안 견디다가 터져버린다. 그 물거품은 바로 나다.’

 이것은 무서운 오류였으나, 이 방면에서 몇 세기에 걸친 인간의 사색과 고심이 낳은 마지막이자 유일한 결론이기도 했다.

 그것은 인간 사상의 거의 모든 방면에 걸친 모든 탐구를 총괄하는 최후의 신념이었다. 또 그것은 군림하는 듯한 신념이었고, 레빈 역시 좌우간 그것이 가장 이해하기 쉬웠으므로 언제 어떻게인지도 모른 채 다른 모든 해석 가운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였을 뿐 아니라 일종의 사악한 힘, 사악하고도 역겨운, 도저히 굴복해서는 안 되는 힘의 잔인한 조소였다.

 어떻게든 이 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수단은 각자의 수중에 있었다. 사악한 힘에 예속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유일한 수단은, 죽음이었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하느님의 가르침 속에서 양육된 나는 기독교가 준 정신적인 은혜에 의해 나의 온 생애를 충만시켜왔고, 온몸이 그 은혜로 채워져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아이처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파괴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자기가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를 파괴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중대한 시기에 다다르자마자, 마치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받는 아이처럼 나는 갑자기 하느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아이처럼 분별없이 날뛰고 돌아다녔던 과거의 시도가, 철없는 장난 때문에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애들보다도 더 적은 효과밖에 없었다고 통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성으로 알게 된 게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지고 나에게 계시된 것이다. 나는 그것을 마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교회가 가르치는 주요한 것에 대한 신앙에 의해 알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그저 모든 사람과 함께 나에게 얘기된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나는 예나 지금이나, 동이나 서나 남녀의 문제는 비슷하구나 하는, 거장의 소설을 읽는 것 치고 다소 가볍게 이 소설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게 1500페이지가 넘는 무거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해 준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뒤로 갈수록 내면 깊은 곳을 다룰 뿐 아니라 다루는 문제 또한 광범위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하릴없이 이해를 포기하고 넘어가는 페이지가 많아졌다. 번역체에 호흡이 긴 데다, 깊고 넓은 주제를 다루다 보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노라고 핑계를 대본다.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나는 안나가 제발 극복하기를 바랐다. 물론 사랑에 빠진 여자 하나가 시대와 가치관을 전복시킬 힘이 있었겠느냐만은, 그래도 이겨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불길한 예감대로 그녀의 이야기는 마무리가 지어졌다.


 그런데 책을 덮었을 때 일반적으로 비극적인 소설을 읽고 느끼는 찝찝하고 무거운 감정이 가슴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긴 소설의 끝이 그녀가 아니라 레빈이라는, 아마도 작가 자신을 투영한듯한 인물의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깊이 사색하고 행동에 있어서 과감하지 못한 레빈은, 그러나 인물들 중 그 누구보다 확고한 믿음을 확보하면서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물론 그 확신을 갖고 레빈이 실제로 어떻게 삶을 살아 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그 확신 이전에 그의 방황과 생각들이 지진 부진해서인지 그가 잘 살아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든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소설책을 덮으며 마음이 무겁지 않았던 걸지도.


 작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고, 사람들이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거실 한 편에서 혹은 카페들을 전전하며 내 이야기를 간간이 정리하는 무명의 에세이스트인 내가 감히 톨스토이라는 거장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독자로서 한 가지 알겠는 것은 인간의 내면, 사회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 이토록 장황한 문장과 단어들을 써가며 끼적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저명한’ 작가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지난겨울 내에 끝낼 줄 알았는데 결국 봄의 끝에서야 겨우 끝을 보았지만, 끝이 나서 홀가분한 기분. 그 기쁨이 가장 큰 것은 어쩔 수 없다. 겨우내 물리적 여행 대신 이야기 속을 잘 여행한 것으로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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