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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Oct 04. 2022

유난히 유약한 가을날에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할머니에게 그 점을 짚어 알려주고 싶었다.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 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세상은 참 이해할 수 없어요. 여전히 모르겠어요. 조금 알겠다 싶으면 얼굴을 철썩 때리는 것 같아요. 네 녀석은 하나도 모른다고.

“그럼 뭐, 우리가 한국을 고쳐?”
명혜가 지겹다는 듯 말했다.

“윗대가리들 싹 날아가고 완전히 다른 사람들로 갈리기 전에는 안돼. 나도 그러니까 은퇴하는 거야. 윗대가리로 할 만큼 했으니까.”

…그때 이후로도 종종 점검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작은 틀에 가두고 있지는 않나? 부엌 뒷방에 방치해 두고 있지는 않나? 그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도 점검합니다. 이걸 네 배, 다섯 배, 열 배 크기로 그리면 달라 보일까?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지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유난히 유약한 가을이다.

버티는 삶이 싫다며 억지 힘을 내 보던 때를 지나

지금은 버티는 하루하루의 위대함을 떠올리고 스스로 힘을 실어가며 버틴다.


그러다 하릴없이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마는 오늘 같은 날엔

반복되는 환경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려 걷는다.


오늘은 그 시간을 독서로 채우고 싶었다. 

<시선으로부터,>는 설렘으로 충만했던 뉴욕 여행 전 들고 갈 책을 고르러 서점에 갔다가

말 그대로 덥석 들어 올린 책인데,

5주간 뉴욕 곳곳을 걷느라 미처 다 읽지 못하고 가져온 이 책을 오늘은 끝을 내야지 싶었다.


읽는 내내 가슴 한편이 시원했다.

내가 평소 생각했던 주제들,

예컨대 여전한 제국주의적 구조와 힘, 환경 문제, 유리 천장이 아닌 유리 벽에 갇힌 듯 사는 여성으로서의 삶 등에 대해 작가가 멋진 문장들로 정말이지 속 시원하게 풀어내 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 속에서나마,

소설 속 가족 구성원들 속에서나마 

내가 꿈꾸던 현실을 느껴서 좋았던 것도 같다.

작가의 말마따나 ‘쉽지 않았을 해피엔딩’을 아주 비현실적이지 않게 그려 주어서, 

즉 개연성 있게 그려 주어서 읽는 내내 좋았던 거다.


그런데 그 시원하던 마음이 결말을 읽어 내릴 때 슬픔으로 바뀌며 눈물이 났다. 


사방에 유리벽이 처진듯한 내 처지가 되려 부각되어 버린 탓이다.

주인공 시선처럼 때론 시원하게 구조와 세상을 탓하고

무작정 당당하게 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해 그랬다.


그리고 하필 자존감이 바닥이 이런 날

누군가 흘리듯 해준 조언에

내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더 솔직히는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랬다. 


내가 치는 발버둥이 마치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노력, 아집, 애씀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그랬다.


어쩌면 십수 년 전 내가 작가라는 꿈을 꾸었던 것도

방어벽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꿈 뒤에 숨어서

노력하고 사는데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는

동정표나 얻고 살자는

얕은 꾀였던 건 아닌가 싶은 거다.


이제는 나조차 나를 믿지 못하겠는 지경에 이른 게다.


십 년을 이렇게 살아보니

책에서 말한, 

예술가에게 20년마다 변곡점이 찾아온다는 말이 무섭게 읽힌다.

아직 그 세월을 채우지 못했는데

나는 벌써 지친 걸까 싶어서.


아니 애초에 시작도 못한 건 아닐까.


질리지 않는 거라면

어쩌다 한 번 떠나는 여행뿐인데

누군가에게 빌어먹듯 떠나는 여행자인 나는 어쩐지 그게 내 재능이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소설이 너무 좋아서

소설 속 여자들의 삶과 생각과 말들이 너무 좋아서

그렇지 못한 내 삶이 초라해져 슬픈 이 구질구질한 마음을 어쩔까.


그건 내 몫이겠지.

어떻게든 지나가야 할 내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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