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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Jan 31. 2023

작가로서의 자긍심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 시오노 나나미

이것이야말로 후일 마키아벨리가 제창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대 국가의 군대의 중핵을 이루어 온 징병제도의 시작이다. 이것은 종래 돈으로 고용하는 병정으로 구성된 용병제도에 비해, ‘직업’이 아니라 ‘의무’가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개혁이었다.


역사상, 이렇게도 재능의 질이 다른 두 천재가 만나, 서로 재능을 살리면서 협력하는 예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레오나르도가 사고의 거인이라면, 체사레는 행동의 천재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의 피안을 유유히 걸어가는 인간이라면, 체사레는 현실의 강에 태연하게 말을 몰고 들어가는 인간이다. 다만 이 두 사람은 그 정신의 근저에서 공통되는 것이 있었다. 자부심이다. 그들은 자기 감각에 맞지 않는 것은, 그리고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를 절대시 하는 이 정신은, 완전한 자유와 통한다. 종교로부터도, 윤리 도덕으로부터도 그들은 자유다. 궁극적으로는 니힐리즘과 통하는 이 정신을 그 극한에서 유지하고, 더욱이 적극적으로 그것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렬한 의지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두 사람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체사레.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 속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완전한 이해의 일치였다. 여기에는 예술가를 보호하는 따위의 파트롱 대 예술가의 관계가 아니라 상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냉엄한 목적만이 존재할 뿐이다. 보호나 원조에 비해서, 또 베풀어준다는 안이한 오만 따위에 비해, 이 얼마나 성실하게 아름다운 일인가!

이러한 관계에서는, 서로 자기의 목적을 명확히 하는 자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상대에 대한 진지한 존중의 마음이 우러난다. 26살의 체사레도, 그리고 50살을 맞는 레오나르도도, 서로 상대에 대해서 진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통일은, 체사레에게 있어 사명감에서 오는 비원이 아니다. 그에게는 어디까지나 야망이다. 체사레는 사명감과 같은 약자의 무기 또는 의지가 필요 없는 사나이였다. 마키아벨리의 이상은, 체사레의 이 야망과 일치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지껄이는 사명감을,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현실적 직시로 해서 믿지 않았던 마키아벨리는, 사명감보다 한층 더 믿을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의 야망을 믿었던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란 어떤 인간이었던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르네상스의 여인들> 속에 간결하게 언급되어 있다. … 시오노 나나미가 일반적인 체사레상에 항거하여 자기 자신의 체사레상을 제시하려고 했을 때, 먼저 부정해야 할 것으로 눈앞에 존재한 것은,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의 문화>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르네상스라는 개념을 창출해 냈고, 또 그것을 통해서 ‘악명 높은 보르자 집안’의 악명을 더욱 높여 높은 J.C. 부르크하루트의 언설이었을 것이다. … 역사의 어둠 한 구석에 몰려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는 체사레를 자기 손으로 구출해 낸다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야심 속에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의 정치관의 본질은, ‘정치란 가능성의 아르테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시오노 나나미는 <이탈리아 공산당 찬가>에서 말하고 있다. 확실히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란 어떻게 목적을 달성하느냐 하는 방책, 혹은 수단에만 있다. …이 역설 속에 마키아벨리의 정치관, 인간과의 중핵이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정치관, 인간관은 이것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그 역설을 허용하는 성질의 것임은 확실한 것 같다. … 일본에서의 정치는 실현 가능성 없는 이상주의적 목적을 소리 높이 외치거나, 목적 없는 미봉적인 아르테를 의미하거나 둘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그 같은 정치관에 길든 일본의 지적 풍토에, 체사레 보르자가 체현하고 있던 정치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그 어떤 충격을 주려고 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 있는 것은, 시오노 나나미가 어째서 이런 정치관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 그녀는 자기를 1937년에 태어난 인간의 하나라고 규정하고, 그 세대적 특징을 “절대적인 그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은” 데에서 찾으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나 전후 민주주의나 어떤 거리를 두고 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세대는,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를 손에 넣고, 동시에 감정적인 행동에 대한 냉담함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그녀가 그것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룰 수 있는 전능적인 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외부에서 절대적인 것을 구하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만 충실하게 산 체사레의 가열한 삶에 격렬히 감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스무 권 이상 읽으면서 이렇게 지루했던 건 사실 처음이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이렇다.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 치이더라도 20년 가까이 한 작가의 책을 즐겨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문장력을 갖춘 상상력의 대가인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이, 사실 위주의 다른 역사서와 너무나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다른 어떤 책 보다 사실 위주로 서술된 이 책을 읽으며 꾸벅꾸벅 졸 수밖에 없었던 것.


하여, 중간중간 내게 익숙한 그녀의 어투가 나타날 때 집중하다 졸기를 반복하다가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잠이 홀딱 깼던 것은

체사레 보르자의 죽음을 다룬 그 마지막 부분에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그 상황을 당장 머릿속에 그려내게 만드는 그녀의 필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해설을 읽고 내가 졸면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내 무지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진 무언가를 뒤엎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온 생애를 바쳐 세계와 사상을 고민한 그녀처럼 살지는 못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어느 순간 나 역시 그녀와 비슷한 결론을 내게 된 게 하나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는 없다는 것.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에는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을 최대한 인정하고 구조를 구축해 가는 나라 혹은 세계가

개중에 살기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자기 생각과 주장이 강한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갖게 된 현세대를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절대화하기 쉬운 존재 같다.

쉽게 말해 현세대는 그런 구시대에 질려버린 듯한 기분.


이런 생각에 이르지 못했던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책이 좋았던 큰 이유가

어느 편에도 확고하게 서기보다

양쪽 혹은 여러 편의 이유를 이해해 보려는 그녀의 너른 마음이 느껴져서인데,

읽는 시간 대부분을 지루해했음에도 종내에 감탄하며 책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모든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그가 가진 작가로서의 자긍심 때문이라는 생각.


조급증과 나른함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자면

차라리 나른함이 좋은데

다시 조급증에 가까워진 요즘,

나에게 그런 자긍심이 쌓이기까지 어쩌면 시간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일침을 주는 듯하여

고마웠던 시간이다.


그나저나 해설에 여러 번 언급된 그녀의 책 <르네상스의 여인들>은 내가 특히 재밌게 읽었던 책들 중 하나인데

세어보니 거의 이십 년 전에 읽은 책.

다시 읽어 보아야 그 세계가, 그녀가 재해석한 체사레 보르자가 제대로 읽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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