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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Feb 14. 2023

100년 뒤에도 우리는 그녀의 말이 아플까

<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허구에 빚진다.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삶 역시 그랬다.
버지니아 올프가 여성에게 필요한 돈의 액수를 일 년에 500파운드라고 말한 건 자기 자신이 매년 그 이상의 재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었다. 강연을 한 시기는 영국에서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가질 권리와 투표할 권리를 이미 얻어 냈을 무렵이었다. 만일 울프가 사는 동안 여성이 여전히 자기 몫의 재산을 가질 수도, 제 손으로 투표할 수도 없었더라면? 그래서 최소 500파운드의 돈을 직접 만져 본 적이 없었다면? 초라한 재정 상태로나마 여성을 위한 대학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자기만의 방을 갖는 날이 어떻게든 왔다고 할지라도, 자기만의 방을 드디어 갖게 된 각자의 순간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되뇌는 일은 없었으리라.


…아니, 우리를 방해하는 건 어디에나 있다. 독립하려면 독립해야만 하는 이유는 물론 신변의 안전 대책까지 항변해야 하고, 남성과 똑같은 일을 해도 구할 수 있는 방의 크기는 더 작다. 그런 와중에도 가격을 차치하고 고려해야 할 점이 너무도 많다. 남성과 함께 살게 되면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서도 다시 노동을 해야 하므로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자야 한다. 정당히 노동을 해서 번 돈을 원하는 데에 쓸 때조차 나의 소비가 사치나 허영의 산물은 아닌지 스스로 검열한다. 여행하고자 할 때에도 여럿이 함께, 안전해 보이는 곳에, 적당한 기간 동안 다녀오는 게 아니라면 누가 됐든 길게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아내 혹은 엄마가 아닌 채로 글을 쓰며 살겠다고 선언할 때에는, 도저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뛰어난 재능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어느 성(나는 보도에서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지요.)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영속적인 여정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용기와 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환상을 지닌 피조물에겐 그것은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겁니다.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에 누운 아기와 마찬가지이지요. 이 측정할 수 없이 가벼운, 그러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질을 어떻게 해야 가장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겠지요. 자기 자신에게 다른 사람보다 천성적으로 우월한 점 (재산이거나 신문, 곧은 콧날이거나 롬니가 그린 조부의 초상화일 수도 있겠지요.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애처로운 책략에는 끝이 없으니까요.)이 있다고 느낌으로써 가능할 겁니다. 그러므로 통치해야 하고 정복해야 할 가장에게 있어서 다수의 사람들, 사실 인류의 절반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막대한 중요성을 가질 겁니다. 그것이 실상 그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겠지요.


…여성은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 마력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마 지금도 늪과 정글뿐 일지도 모르지요. 온갖 전쟁의 위업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아직도 양의 뼈다귀에 사슴의 윤곽을 긁어놓거나 부싯돌을 양가죽이나 미개한 취향에 걸맞은 단순한 장식물과 교환하고 있을 겁니다. 초인이나 운명의 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러시아 황제와 로마 황제는 왕관을 써 본 적도 빼앗긴 적도 없었을 겁니다. 문명사회에서 거울의 용도가 무엇이건 간에, 거울은 모든 격렬하고 영웅적인 행위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무척 빈번히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일면 도움이 됩니다. 남성이 여성의 비판을 받고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설명해 주지요. 여성이 남성들에게 이 책은 좋지 않다거나 이 그림은 형편없다거나 그 밖의 어떤 비평을 할 때마다. 똑같이 비평하는 남성들에 의해 야기되는 것보다 더 큰 분노를 일으키고 더 큰 고통을 준다는 사실도 설명해 줍니다. 만일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거울 속의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고 삶에 대한 적응력도 감소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일을 하는 여성들을 알 테니 그 일의 어려움을 상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요. 또한 돈을 벌어 그 돈에만 의존해서 사는 어려움도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애를 써 보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지금도 여겨지는 것은 그 당시 내 마음속에서 싹튼 두려움과 쓰라림의 독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원하지 않는 일을 늘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항상 부득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고 또 모험을 하기에는 너무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에 노예처럼 아부하고 아양을 떨며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단 하나의 재능이 -작은 것이지만 소유자에게는 소중한- 소멸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나무의 생명을 고갈시키며 봄날의 개화를 잠식하는 녹과 같았습니다.


 그 당시의 쓰라림을 기억하건대,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 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계급이나 성을 뭉뚱그려서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지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본능에 휘둘리고 있으니까요. 그들, 가장들과 교수님들 역시 극복해야 할 끝없는 어려움과 끔찍한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육은 어떤 점에서는 내가 받은 교육만큼이나 잘못된 것이었지요. 그것은 그들에게서 그만큼 큰 결함을 낳았습니다.


… 내가 이러한 결함들을 인식하게 됨에 따라 두려움과 쓰라림은 점차 완화되어 연민과 관용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리고 일이 년이 지나자 연민과 관용도 사라지고 가장 커다란 해방, 즉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가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저 건물을 내가 좋아하는가 아닌가? 저 그림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 내 생각에 그것이 좋은 책인가 나쁜 책인가? 진정 숙모 님의 유산은 내게 하늘의 베일을 벗겨 주었고, 밀턴이 우리에게 영원히 숭배하라고 천거한 신사의 크고 위압적인 모습 대신 훤히 트인 하늘을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백 년이 지나면, 집 문 앞에 이르러 생각하건대,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들 은 한때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모든 활동과 힘든 작업에 참여할 것입니다. 아이 보는 여자는 석탄을 운반할 것이고 가게 주인 여자는 기관차를 운전할 것입니다. 여성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 관찰된 사실에 근거를 둔 모든 가설들은 사라 질 것입니다.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데 어떤 마음 상태가 가장 적합한가 하는 나의 본래의 물음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볼 때, 이처럼 민감한 그들의 감수성은 이중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보면서 추측건대, 예술가의 마음은 자기 속에 내재한 작품을 흠 없이 완전하게 풀어놓으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 셰익스피어의 마음처럼 작열해야 합니다. 그 안에 어떤 방해물 이 있어서도 안 되고 태워지지 않는 이물질이 끼어서도 안 됩니다.


 여성은 언제나 방해를 받았지요. 그곳에서 시나 희곡을 쓰는 것보다는 산문과 픽션을 쓰는 것이 더 쉬웠을 겁니다. 집중력이 덜 요구되니까요. 제인 오스틴은 생애 마지막 날까지 그런 환경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녀의 조카는 회상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숙모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숙모님에게는 종종 찾아갈 만한 독립된 서재가 없었고, 또 숙모님이 쓴 작품의 대부분은 공동의 거실에서 온갖 종류의 일상적인 방해를 받으며 쓰여야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에 여성이 받을 수 있는 문학 훈련이라고는 성격 관찰과 감정 분석 훈련이 고작이었지요. 그녀의 감수성은 몇 세기 동안 공동 거실의 영향을 받아 훈련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이 그녀에게 인상을 남겼고, 개인들의 관계가 항상 그녀의 눈앞에 있었지요. 그러므로 중산층 여성이 글을 쓰게 되었을 때, 그녀는 당연히 소설을 썼습니다.


마음이란 확실히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도전적으로 의존하는, 참으로 신비로운 기관입니다. 나는 창 문에서 고개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몸이 명백한 원인들로 인해서 긴장하듯이, 마음에도 단절과 대립이 있다고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마음의 통일성'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고 나는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마음이란 어느 때고 어떤 점에라도 집중할 수 있는 막대한 능력을 지녔기에 단일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 듯하니까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 여성이 어떤 불평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대의를 변호하는 것, 어떤 식이건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 의식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쓰인 것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옥해질 수 없지요. 그런 작품은 당장 하루 이틀 동안은 빛나고 효과적이며 강력한 걸작처럼 보일지 모르나, 해 질 무렵이면 시들어 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라날 수 없는 것이지요. 창조적 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반대되는 성들이 결합하여 신방에 들어야 하지요.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려면 마음 전체가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하고 또 평화가 있어야지요.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여러분 스스로 충분한 돈을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발리 여행에 딱 두 권의 책을 가져왔고 그중 첫 번째로 집어든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강연문이 담긴 <자기만의 방>이었다. 발리에서 4주 중 반은 산에서 반은 바다에서 보내기로 했는데, 고요한 가운데 온몸과 정신이 풀어지는 듯했던 산에서 이 책을 집어든 게 다 읽고 나니 고마운 우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몸과 마음이 바짝 날이 서 있거나, 긴장된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얼마간 절망감에 빠져들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거의 100년 전 진보적이라 불리던 한 여성의 남녀차별적 구조와 현실에 대한 지적들에 내가 여전히 공감하고 있다는 것. 그런 생각들을 입 밖으로 풀어낼 때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 비판적인 것 아니냐는 소리를 여전히 듣는다는 것 때문에. 또한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 즉 돈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역설이 나는 무엇보다 공감된다. 10여 년 넘게 워킹맘이 아닌 전업주부로서 작가라는 꿈을 지키며 사는 나는 요즘 무엇보다 내가 번 돈으로 무언가 하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하니까.


 자존감이 충분하지 못한 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이 나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역시 확실하다. 그것을 뚫고서라도 내가 여행자로서, 글쟁이로서 내 자리를 지키려면 흔히 말하듯 버텨야 한다는 것도.


  그럼에도 이런 글이 마음을 슬프게 건드리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탄 혹은 투정이라고 해두자. 그것도 하지 못할 만큼 게을리 살고 있지 않으니. 남녀뿐 아니라 그 모든 다양성이 진정한 의미에서 ‘어우러져’ 살아갈 날이 미래 어디엔가는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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