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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May 01. 2019

스무 살, 서른여섯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게 있는 법이죠." 울가는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것 역시 너무 어렵다. 억지로 설명하려 하면 어딘가에 거짓말이 생겨난다.

...사람의 마음은 밤의 새다. 조용히 뭔가를 기다리다가 때가 오면 일직선으로 그쪽을 향해 날아간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개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야. 겉으로 잘 드러나는 사람과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야.”

“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 지는, 확실히 호감이 가는 그릇으로.”

...그것은 올바른 가슴 아픔이며 올바른 숨 막힘이었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 차가운 중심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녹여내야 한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동토를 녹이기 위해서 쓰쿠루는 다른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독하게 지루했던 그의 소설이 이렇게 흥미롭게 읽히게 될 줄은,

그런 나이가 될 줄은
스무 살의 나는 알지 못했다.

이보다 먼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통해 작가가 자신을 설명한 글을 읽은 후라, 소설이 내게 더 잘 읽혔던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규칙적이고 성실한 삶의 태도가 서술에서, 이야기에서, 인물에서 드러난다.


또한 지루해 보였던 그의 문체에서 나는 이제 안정감을 느낀다.

작가의 삶과 마음이 그래서이지 않을까 싶다.

규칙적이라는 것은 쉬이 지루해질 수도 있다는 건데
내가 그와 비슷한 루틴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지 지루하지 않고 되려 흥미진진했다.
(하루에 100페이지 이상은 잘 읽지 않는 내가 한 자리에서 250페이지를 읽어내렸으니.)

일단 내가 그의 수필에서 너무나 큰 힘과 위로를 얻어
무작정 그의 편이 되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성장을 담아내는 그가 좋고, 그의 이야기가 좋다.


스무 살의 내가 그의 소설을 읽다 지루해졌다는 건 내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때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오십이 넘은 그가 적어 내린 성장과 성찰이 재미있게 읽히는 걸 보니
내가 인생의 서론 정도 이해가 될 만큼은 살았나 보다.

내가 써가고 있는 하루하루가 쌓여
그처럼 든든한 무게를 갖출 수 있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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