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가 놀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작가 Jul 03. 2019

오기로 읽었습니다만

<더 로드> / 코맥 매카시

‘네가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
소년이 뭐라고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더러운 얼굴. 그렇다고요. 제가 그런 존재라고요.’

‘...하지만 길을 잃으면 누가 찾아주죠? 누가 그 아이를 찾아요?
선이 꼬마를 찾을 거야. 언제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이렇게 힘든 독서는 오랜만이다.
읽는 게 너무 힘들어서 빨리 읽어버렸다.
남편은 그런 나를 두고 왜 읽느냐고, 읽지 말라고 했다.

내가 그만큼 괴로워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것은 사실

독자로서의 오기 같은 것이다.

읽기 싫으면 아예 시작을 안 하지,

만약 읽기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여태껏 읽다 만 책이 두 권 있긴 하다만)
이 책은 그것과 다른 이유가 보태져 끝을 보고야 말았다.

읽는 내내 너무 괴롭고

왜 이런 이야기를 써야만 했을까 작가를 원망하면서도,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될 만큼
이 소설의 긴장감은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끝까지 읽는 데 성공했고

내가 기대한 뻔하고 희망 가득한 결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희망적이었다.

검댕이 가득하고 구역질 나는 냄새로 가득한 ‘길’을 끝없이 걷는 부자,
그들은 위협당하고, 굶어 죽을 것 같다가
종내에는 기가 막히게 살 가능성을 얻는다.

그때 독자는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책 뒤편에 나온 옮긴이의 설명을 보니

작가 자신이 지나온 삶을 통해 얻은 일종의 믿음이 그랬던 것 같다.
어떻게든 살아지는, 살아갈 길이 생기는 게 인생이라는 것.

아무튼 독자의 기대와 달리 시원한 결말이나 밝은 세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시종일관 긴장감을 주는 타인에 대한 경계가
소설 말미 아버지의 죽음 이후 쉽게 풀려 버린다.

총체적인 비극은 아닌데
그렇다고 명확한 희망이 보이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평에는 희망이 명확히 보인다는데

내 머릿속에는 그게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인간에 대해 완전한 부정만은 하지 않은 것.
‘선’이라는 걸 끝까지 추구하는 것.

그가 믿는 게 결국 사람이고 절대적인 선 혹은 신인 걸까?

아,
어쨌든 끝이 났다.

지금 내가 사는 세계가 썩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요즘인데
단 이틀 이 소설 속에 빠져 있다 나와보니 참 밝구나.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혹여 소설 속 미래가 아닐까 두려워지지만.
여기서 상상은 끝내는 걸로!

매거진의 이전글 On the roa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