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무계획 퇴사자의 중간 점검
'1년 정도 헛발질한다 생각하고 진짜 내 길을 찾아보자. 그러고 나서도 회사가 필요하면 내년에 다시 취직하거나, 해외 취업에 도전하거나, 워홀을 떠나면 그만이야.'
퇴사 시점의 내 마음가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퇴사하고 반년 동안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에 겨워 한 시도 웃음을 잃은 적이 없었다. 자유로운 요정이 되어 세상 모든 시공간을 맘껏 누비는 기분이었다. 수면 부채가 쌓이지 않아 예민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고, 스트레스의 공격을 받지 않아 무탈한 신체가 되어갔다. 배우고 싶던 것과 하고 싶던 것을 모두 누리며 더 개성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진정 내가 원하던 삶이었다. 행복과 건강이 최우선시되는 일상.
하지만 퇴사 7개월 차에 접어들 때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건드리고는 있는데 뭐 하나 굵직한 길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괜히 조급해지기 시작한 거다. 게다가 통장 잔고까지 점차 바닥을 보였다. '이러다 영영 내 길을 못 찾고 부유해 버리면 어쩌지.' '여태껏 탄탄대로로 살아왔는데, 말끔히 닦아온 길과 달리 앞으로 걸어갈 길은 불투명해져 버리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이 초조한 마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3개월을 방황했다. 살면서 한 번도 지녀본 적 없는 열패감을 느껴보기도 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격지심에 시달리기도 했다. 새로운 모임에 나가도 뚜렷한 명함 한 장 내밀지 못하는 내가 밉기도 했다. 그 안에서 결국 난데없는 우울증이 찾아왔다. 날 때부터 외향형인 인간은 그 길로 캄캄한 집 안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기도 했고, 죄 없는 주변인들과 교류를 끊어버리고 고립된 생활 속에 침잠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인생에 제동 장치가 걸려버리면,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 이겨내는 편이다. 이번엔 그럼 뭘로 이겨낼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카이빙'을 하기 시작했다. 퇴사 후에 나는 어디에 도전하고, 무얼 이뤄냈을까. 국제 와인 자격증 따기, 에세이집 만들기, F&B 사업하기, 출판사 창업 준비하기, 글 모임 다니기, 요가하기, 공연하기, 미뤄놨던 공부하기, 다이어트 성공하기, 평일에 여행하기, 아르바이트 도전하기, 각종 강연을 들으며 취향에 맞는 사업 아이템 찾기, 마음껏 독서하기, 브런치 시작하기... 기록을 통해 돌아보니 어쩌면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을 몰입해서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1년간 쉬지 않고 어마어마한 일들을 해왔는데 회사라는 울타리 하나 없다는 이유로 나는 나를 있는 힘껏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던 거다.
아카이빙을 통해 나만의 강점을 읽어내고는 앞으로 나아갈 길의 윤곽도 잡았다. 우선, 포트폴리오와 사업계획서를 들고 서류와 면접에 통과해 마포구에서 운영하는 출판 센터에 입주 기업으로 발을 들였다. 지금 몸담고 있는 가족 사업체 운영을 통해 일정 부분 나의 생활비를 마련하면서, 이곳에서 소소하게 몇 권의 책을 출간하고, 몇 년 뒤 키워낸 출판업을 기반으로 구상해 놓은 플랫폼 스타트업까지 만들어보고 싶다. 변덕스러운 내가 이 여정 안에서 또 어떤 갈림길로 새 버릴지는 나조차도 예상할 수는 없다. (처음에 퇴사할 때는 하와이 어학연수와 호주 워홀을 잠시 떠났다가, 와인으로 프랑스 유학을 가겠다고 했었던 나다.) 그래도 명확한 길을 정하고 반듯한 출발선 앞에 새로이 서있던 이번 한 달이 내게는 참 안정된 시간이었다.
울타리 하나 없이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여정이 나를 더 강하게 키우고 있다. 지금은 흔들릴지라도 먼 훗날 내가 오늘날의 흔들림 덕에 얼마나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할지 기대가 된다. 더 많이 흔들린 나무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말이 있듯 내게 찾아드는 시험을 두 팔 벌려 환대해보려 한다. 나만이 가진 무기인 용기로 이 세상에 한번 대차게 부딪혀보기로. 느리게 가더라도 그 과정 안에서 내가 충분히 반짝이고 있다는 걸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퇴사자에게 결과물이란 장거리 마라톤 메달과도 같으니까.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부단히 나를 찾아 떠날 것이다. 나만이 아는 뿌듯함들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 내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있기를 바라며.
'참 잘하고 있다. 그냥 이대로만 가자.'
퇴사로부터 10개월이 흐른 지금 시점의 내 마음가짐이다.
주말에 다녀온 '알렉스 키토' 사진전에서 담아 온 사진입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가고자 하는 가치관이 저와 많이 닮은 작가님이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길이 열린다는 작가 인터뷰가 마음을 콩 때렸습니다. 꿈을 향해 과감히 나아가고 그 안에서 실패하면 방향을 바꾸면 그만이라는 말, 사랑하는 일로 얼마든지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많은 공감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