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
"지속가능한 반백수", 딱 이 단어에 꽂혀서 책을 샀다. '지속가능한 개발' 등 뭔가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이 단어 쫌 멋있네'하며 눈여겨 보았던 단어여서 여전히 매력있었다. 게다가 이 단어가 '반백수'라는 의미심장한 단어와 합체를 하니 '과연 내가 이 책을 사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싶었다. 어떻게 탱자탱자 놀면서 살 궁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세심한 메뉴얼인가 싶기도 했다. 당연히 아니었습니다만...
프리랜서인 작가가 삶의 경험 속에서 추출한 것은 '나'다. 다른 어떤 이가 아닌 '나'.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할 것은 '나 자신'이고,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해줘야 한다.
요즘 의도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나'에 대한 책을 읽게 된다. 서평이벤트 신청해서 열심히 나에게 달려오는 책도 '나'에 관한 것인데... 아마 이는 시대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고, 또 내 자신이 '나'답게 사는 것을 갈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는 니체의 언어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초인의 또 다른 이름, 아니 입법자의 또 다른 이름은 '자기답게 사는 자'다. 자기 자신이 되는 자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주현성, "오늘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았습니다", p.73)
저자는 창작자인 '나'를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그러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단서가 붙지만요.
"창작은 돈이 든다. 돈이 수시로 들어가는 행위다. 금덩어리를 주무르고 깎아 다이아몬드를 콕콕 박는 작업을 해서가 아니라, 돈이 종종 창작의 연료가 되기 때문이다.(p.202)
최민석 작가는 이를 가리켜 몸의 퇴고라고 표현한다.
"아무튼 안 써먹을지도 모르는 취재를 왜 꼬박꼬박 하느냐하면, 그 취재의 과정을 통해서 소설이 완성되는 것과는 별개로 소설가로 완성되기 때문이다.(중략)
말하자면 몸속에 소설의 공간과 공기를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몸으로 쓰는 소설 역시 퇴고의 기간이 있어서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것은 몸과 정신이 자연스레 잊게 된다. 나는 이것을 몸의 퇴고라 한다."(최민석, "꽈배기의 멋", p.70)
한 개인이 이렇게 살아갈 때, 사회는 어떻게 변화할까?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엄친아나 엄친딸 같은 말도 의미를 잃을 것입니다.(p.221)-김영하, "말하다"; 신예희,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에서 재인용.
"누구나 그렇게 살잖아." 라고 말하는 순간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세상'이 펼쳐진다. (물론 제가 지어낸 말은 아닙니다. 분명 어디선가 읽었는데 기억이 안나요. 살아가면서 계속 꺼내보려고 마음 속에만 적어놓아서, 문구만 기억이 납니다. 인용표시를 못해 죄송할 따름이에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세상을 피해 지속가능한 삶을 걸어가고 싶다면 반백수(프리랜서) 작가님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