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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Jul 30. 2024

감정쓰레기통이 필요할 때

2018.09.22(토)


새로운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찾았다. 기존 병원보다 상담을 잘해 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친절한 의사가 있다는 곳을 알게되었다. 병원은 소문을 따라온 많은 환자들로 북적였다. 복도부터 입구까지 빽뺵히 놓인 의자를 따라 촘촘히 앉아있음에도 자리가 모자라 서서 대기하는 이들이 있었다. 예약을 하고 왔음에도 한 시간이 넘게 기다린 끝에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 젊은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의사 선생님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음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상냥했다.


나는 기존 병원에서 서류로 때온 약성분을 내보이며 병원을 바꿔보고자 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병원을 바꾼 이유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고 나니, 왜 애초에 병원을 찾아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도 당연히 설명해야 했다. 공황장애,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은 것부터 병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인 가정사에 대한 장황한 말이 늘어졌다. 의사 선생님은 꽤 긴 시간 동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좀 후련했다. 왜 여기가 상담을 잘해주기로 유명한 병원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약을 처방받아 나오는 길,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급격한 우울감이 찾아들 때 병원을 찾아서 응어리를 뱉어내고 나면 조금 숨이 쉬어졌다. 누군가에게 부채감 없이 속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게 나에겐 꼭 필요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내 우울과 공황에 대해, 나의 불행과 슬픔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 편하자고 그들을 감정쓰레기통 취급하는 일이었다. 그들도 처음엔 격한 공감과 위로로 답을 해주다 지쳐갈 게 뻔했다.


내게 답은 하나였다. 남자친구. 가장 편한 존재였다.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해지고자 그에게 끊임없는 감정의 민낯을 그대로 쏟아냈다. 그가 지쳐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넌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넌 내 말을 들어야만 해." 난 이기적이게 나를 위해 그를 이용했다. 난 정신이 아프다는 핑계로 그가 감당하지 못할 부담을 준 걸 그 당시에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내게는 감정의 전이 없이, 불편한 부채감 없이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간절히 필요했다.




2018.10.13(토)


코피를 쏟는 일이 잦았다. 최근 두 달 사이에 밤 낮 없이 코피를 자주 쏟았고, 한번 흐르기 시작한 코피는 잘 멈추지 않았다. 출근 전 코피가 터져 옷이 다 버렸는데, 그러고도 멈추지를 않아 회사에 지각할 뻔한 적도 있었다. 이비인후과를 찾았으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게 분명해 보였다. 주기적으로 갑상선 병원을 찾아 피검사를 하고 약을 처방받았는데, 이번 피검사 결과가 좋지 않았다. 간수치가 높았고 백혈구 수치는 낮았다. 갑상선 수치도 꽤 높게 나왔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수치가 좋지 않았다. 약물 부작용인 것 같다는소견을 들었다. 약국에서 약을 타서 나오는 발걸음이 터덜터덜 힘없이 늘어졌다. 괜스레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난 열심히 살았는데. 나쁘게 산 적도 없는데. 먹어야 할 알약 개수들이 늘수록 자기 연민도 늘었다. 그래도 회사에선 웃었다. 미팅에 참석해서 의견 표출도 열심히 했고, 회식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사수들은 내가 당차고 똘똘하다고 생각했다. 당당, 해야만 했다. 우습게 보이기 싫었다. 회사에서만큼은 인정받고 싶었다. 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하루에 먹어야 할 알약이 20개 정도 되었지만, 들키면 안 됐다. 가을은 깊어갔고 쓸쓸히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이 울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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